‘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은 예술품 감상에만 국한되는 건 아닐 것이다. 여행지에 얽힌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것들도 마찬가지여서, 아는 정도에 따라 여행의 깊이와 여행자의 상상력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지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아름다운 경관 이면에는 어떤 사연들이 숨어 있는지 등을 알아보려고 하는 건 여행지에 대한 애정의 발로이다. 결과적으론 여행을 더욱더 풍요롭게 몰아가는 촉매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제주에 여행 오는 외지인들의 마음가짐도 점차 변하고 있는 듯하다. 예전엔 오로지 아름다운 자연경관만 즐기다 갔지만 요즘은 다크 투어리즘 등 제주의 아픈 역사를 함께 만나보려는 여행객들이 점점 늘고 있다.
제주올레 1코스의 백미는 역시 성산 일출봉일 것이다. 잠시 올레 코스를 벗어나 정상에 올라보는 게 좋겠다. 새벽에 올라 일출을 본다면 물론 금상첨화다. 올레 코스에만 충실하기로 해서 그냥 지나치면 뭐 어떤가. 멀리서 보이던 일출봉이 가까워지는 느낌도 좋고, 지나쳐 멀어지는 일출봉을 뒤돌아보는 느낌 또한 아련하다.
조금만 의식한다면 아름다운 경관 뒤에 숨겨진 어두운 이면도 볼 수 있다. ‘자연’이 아닌 ‘역사’를 만나는 것이다. 일부러 작정하고 유심히 보지 않는 한 대개는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눈썰미 좋은 외지인 올레꾼이라면 1코스 종점 부근에서 일출봉을 뒤돌아보며 ‘저게 뭐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절벽 아래 해안선에 커다란 동굴 여러 개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터진목까지 나아가기 전에 일출봉 주차장을 지나 동암사 사찰과 반대 방향으로 내려오면 잠시 끊겼던 해안선이 다시 기다랗게 펼쳐진다. 검은 모래사장을 따라 광치기해변과 멀리 섭지코지까지 아득하다. 올레 코스만 따라 걷던 걸음을 잠시 돌려서 수마포 해안으로 내려서본다. 옛날 조선시대 때 조정으로 보낼 말들을 실어 나르던 이 포구 해안에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은 연합군 상륙 방어용 진지를 구축하였다.
먼저 만나는 두 개의 동굴 벽이 시멘트로 마감된 걸로 봐서 자연 동굴이 아닌 인공으로 판 것임을 알 수 있다. ‘태평양을 뒤흔든다’는 뜻의 1인승 가미카제 보트인 ‘신요(震洋)’의 보관 진지들이다. 이곳에 숨어 있다가 유사시 폭탄을 싣고 미 군함에 고속으로 돌진하여 자폭하는 것이다. 하늘에서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처럼, 패색 짙어가던 당시 일본의 마지막 발악 모습을 보는 듯하다. 하마터면 제주도 전체를 생지옥으로 만들 뻔했던 역사의 흔적들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연합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한 뒤 일본 본토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패전이 확실시되던 일본 군부는 극도의 두려움에 빠졌다. 어찌하면 본토만큼은 사수할 수 있을지 비책 마련에 혈안이 돼 있었다. 턱 바로 밑인 오키나와까지 치고 올라온 미군이 본토에 상륙할 만한 지점 6군데를 예상하여 각각에 대한 가상의 시나리오를 짰다.
북쪽 홋카이도로 상륙할 경우인 ‘결 1호 작전’에서부터 남쪽 규슈로 상륙할 경우의 ‘결 6호 작전’까지 여섯 개 시나리오가 수립되었다. 결국엔 그중에서도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하나로 결론이 모아졌다. ‘미군은 먼저 제주도에 상륙하여 거점으로 삼은 후 곧이어 규슈 북부로 공격해 온다’는 것이었다.
지도를 펴놓고 필리핀 열도와 오키나와 그리고 제주도와 일본 열도를 함께 들여다볼 때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동선이다. 이에 따라 조선 반도 남쪽의 외딴섬 제주가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결정되었다. 일본 열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가 되어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일본 군부는 신속했다. 인구 20만을 조금 웃돌았던 제주 섬에 일본군 7~8만 명이 밀려들었다. 한국인 강제 징용과 징병이 포함된 인원이다. 전원 옥쇄를 각오하고 연합군 상륙을 저지하라는 군부로부터의 무서운 지침도 내려졌다. 일제 초기에 만들어져 중국 폭격 기지로도 사용됐던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에 추가하여, 섬 전체 요소요소에 진지와 요새들이 구축되었다. 속전속결이었다.
호남 등지에서 끌려온 광산 노무자들과 제주 민간인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특히 해안 암벽을 뚫어 진지 동굴을 만드는 현장은 죽음의 사역장이었다. 이곳 동쪽 해안 일출봉 말고도 서쪽에 수월봉, 남쪽엔 송악산과 삼매봉, 그리고 북쪽엔 서우봉과 사라봉 등 제주 섬 해안선을 따라 수백 개의 진지 동굴이 만들어졌다. 모두 ‘신요(震洋)나 ‘카이텐(回天)’과 같은 1인승 자폭 병기들을 숨겨둘 자살 특공기지였다. 해안선 1차 저지선이 뚫렸을 때를 대비하여 어승생 등 중산간 오름들에 거대한 요새도 구축했다. 2차 저지선이지만 최후의 결전장이었다. 이때는 제주 민간인들을 끌고 올라가 총알받이로 내세울 참이었다.
비슷한 시기 오키나와에선 미군이 상륙하여 3개월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모두 합쳐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엔 오키나와 주민 9만 명도 포함돼 있었다. 모두 일본 군부에 의해 결사 항전을 종용당하다가 옥쇄라는 미명 하에 강제 집단자살로 희생된 경우다. 그다음이 제주도였던 것이다.
미국은 망설였다. 전투기 한두 대가 돌진해 와 미군의 거대한 구축함 한 대를 침몰시키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행태를 익히 경험한 바 있다. 오키나와에선 자멸하는 일본군이 현지 주민들을 끌어다 함께 자결해 버리는 집단 광기도 지켜보았다. 미국으로선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군이 치를 희생이 워낙 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결정적 한방’이 필요했다. 일본 군부의 속내를 다각도로 분석한 끝에 미국은 드디어 최종 전략을 수립한다. ‘인류 최초의 핵무기 사용’이라는 역사적 부담을 감내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윽고 1945년 여름, ‘리틀 보이(Little Boy)’와 ‘팻 맨(Fat Man)’이라는 귀여운 이름의 폭탄 두 방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이틀 간격을 두고 연이어 떨어졌다. 일본은 항복했다. 제2의 오키나와가 될 뻔했던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제주 섬은 아슬아슬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