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르 캬레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스페인의 가수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학을 전공했지만, 결국 가수의 길을 택했다. 1970년대 그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며 슈퍼스타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역시 라틴권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언젠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열 살 무렵이었다. 무대 위의 그는 발목 바로 위에서 바짓단이 마무리되는 하얀 바지에 더블브레스트 재킷을 걸치고,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이었다. 그렇게 그 특유의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 생경했지만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을 정도니까.
그의 노래를 많이 들어본 것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영화는 바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였다.
영화 속에 펼쳐진 영국 스파이들의 크리스마스 잔치는 재미없어 보였다. 싸구려 테이블보가 덮인 테이블을 배경으로 스파이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뿌옇게 아지랑이터럼 피어오른 담배 연기가 시야를 흐렸다. 늘어질 대로 늘어진 권태로운 잔치가 하이라이트를 향해 가는 가운데, 얄미운 콜린 퍼스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카메라 뒤편에서, “그 매력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La Mer 라 메르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작년 12월 말, 인스타그램의 알 수 없는 알고리듬은 나를 바로 그 장면으로 안내했다. 크리스마스 최고의 씬이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꼭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다시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를 느끼고 싶었다. 꾀죄죄한 1970년대 스파이 아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 어딘가 숨어있는 그 책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며칠 뒤에나 다시 읽게 되었다.
첩보의 시대, 냉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훌륭한 작품을 남긴 작가들이 있었다. 이제는 모두 떠났다.
그중에서도 존 르 카레는 뭐랄까, 독보적인 대부의 이미지를 풍긴다. 그가 창조해 낸 인물들 때문일 것이다.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하며, 어딘가 버림받은 것 같기도 한 사람들. 철저하게 개인적인 존재들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말미에는 1991년에 작가가 남긴 후기가 실려 있다. 이 소설을 쓰며 고통스러웠다는 이야기, 콘월을 그리워했다는 고백, 킴 필비는 나쁜 놈이라는 단정 같은 것들. 그 후기를 읽다 보면 어렴풋이 알게 된다. 왜 그의 인물들이 그렇게까지 안쓰러운지.
그렇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그가 창조해 낸 인물들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이 아니라, ‘안쓰러움’. 안쓰럽다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사람의 딱하고 가여운 처지를 보고 마음이 언짢고 애틋하며 불쌍하게 느껴지는 감정”이다.
언짢고, 애틋하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리머스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이번에 읽은 소설 속 인물들 역시 나를 언짢게 하면서 동시에 애틋함을 불러일으켰다. 스마일리도, 프리도도, 타르도, 헤이든도. 어느 곳을 향하는지 그들조차 혼란스러웠을 충성심은, 그들을 지켜보는 제3자의 시선에서는 개인에 대한 애틋함으로, 안쓰러움으로 남는다.
존 르 카레는 자신의 소설 가운데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이 작품의 제목을 영국의 동요에서 가져왔다. 동요는 어른의 삶에 대한 비유로 제격이다.
"테일러" - 이 단어가 핵심이다. 서커스의 수장, 컨트롤은 편집증 환자처럼 밀폐된 사무실 안에서 자신만 알고 있는 문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는 그 단어를 한 사람에게만 전했다 - 짐 프리도. 묵묵히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사람. 탁월한 지성과 행동력, 과묵함을 갖춘 현장 요원은 체코에서 잊어버리기 불가능한 상처를 입고 돌아온다. '테일러'는 그에게 陽양이자 陰음이었다.
컨트롤은 그가 가장 신뢰하던 부하 스마일리에게조차 이 단어를 숨겼다. 너무 위험하고 너무 거대했으며 스마일리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었음을 컨트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스마일리는 결국 그 거대한 계획을 파헤치고, 끝까지 쫓아 마무리한다.
영화에서 게리 올드만이 분한 스마일리는 원작 속 인물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생각보다 방대한 서사를 2시간 남짓의 영화로 압축하기 위한 불가피했겠지만,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온전히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원작의 스마일리여야만 했다.
키가 작고 통통한 스마일리 - 비 오는 런던 거리에서 무릎길이의 검은 코트를 걸치고, 눈앞에서 택시를 놓쳐 발을 동동 구르는 중년의 영국 아저씨. 그는 스파이다. 탁월한 스파이. 누군가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장단을 맞춰 주면서, 머릿속에서는 그 모든 조각을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퍼즐을 완성하는 조용한 첩보원이다.
그에게는 약점이 있다. 치명적인 약점 - 좋은 가문 출신의 아내, 앤. 이 남자 저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앤.
컨트롤이 좇던 거대한 계획을 파헤치는 과정에서도 스마일리는 앤을 생각한다. 영화에서 다소 뜬금없이 등장하던 앤의 이야기는, 원작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반드시 필요한 조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물, 마치 몰타의 매처럼 거기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 존재의 부피를 가늠할 수 없는 카를라. 그는 스마일리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스파이의 세계를 하나의 ‘업’으로 본다면, 카를라는 스마일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유일무이한 동료다. 다만, 적일 뿐이다.
테일러가 짐 프리도에게 陽이자 陰이었다면, 카를라는 스마일리의 陰이다. 스마일리의 그림자,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 그렇기에 카를라는 스마일리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마일리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대체 불가능한 감정을 그는 이해했다. 그리고 그렇게 카를라는 빌 헤이든을 스마일리에게 보낸다.
빌 헤이든은 늘 스마일리의 그림자 속에 있었다.
앤의 이야기는 그렇게 기능한다.
후기를 적다 보니, 게리 올드만이 캐스팅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평생을 스파이로 살아온 끝에 지쳐버렸지만, 그렇다고 스파이가 되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어 결국 계속해서 스파이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 그 권태 속에 깃든 묘한 안온함. 게리 올드만이 잘 어울리기는 한다.
나를 이 소설로 다시 이끈 영화 속 “그” 크리스마스 잔치 장면은 스크린상에서 상세히 풀어낼 수 없던 미세한 부분들을 함축하는 명장면이다.
책을 읽다가 옛날 생각이 났다. 중학교 2학년을 올라가자마자 조를 짜서 담임 선생님과 방과 후에 단체 면담 비슷한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다. 꿈이 뭔지, 지금의 고민은 무엇인지, 남은 1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같은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것, 꿈을 적어서 각자의 앞에 명패처럼 놓고 면담을 진행했다.
그때 나는 '스파이'라고 적어서 내 명패로 삼았다. 왜 스파이가 되고 싶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평범한 '꿈'을 거부하고 싶었던 사춘기의 객기였던 것 같다. 튀고 싶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평범한 꿈을 꾸진 않겠다는 이상한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담임 선생님은 20대 후반의 여자분이었는데 '스파이' 세 글자를 보고 당황한 기색을 보이셨다.
스파이가 되려면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것들을 갖춰야 하며, 동시에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것들을 희생시켜야 할지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의 유치한 객기였다.
이제 나는 '직업으로서의 스파이'가 어느 한 부분 이해가 되는 나이가 되었다.
존 르 카레를 하면 '해리 피어스'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BBC에서 10년간 시즌9까지 방영한 스푹스 Spooks는 MI5 직원들의 현실을 그린 드라마다. 그들도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는 회사원이다.
몇 개 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고, 탁월한 기억력과 뛰어난 거짓말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월세도 내야 하고, 명품도 사 입어야 해서 고민하는 직장인이다.
물론 매 순간의 스트레스는 일반 직장인과 비교할 수 없다. 그들은 '사선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쉽게 죽는다. 어, 이렇게 죽어도 되나 싶은데, 그렇게 죽는다. 스파이의 삶이 그러함을 Spooks는 냉정하게 보여준다.
홀로 끝까지 살아남는 '해리 피어스'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 "Harry Pearce" (이건 드라마를 봐야 알 수 있다)
냉전은 이미 한참 지난 과거가 되었지만, 첩보물은 여전히 인기를 끈다. 지적이고 은밀하며, 위험하지만 어딘가 낭만적인 세계.
이런 다소 진부한 첩보물의 정의를 넘어선 시리즈가 있다 - 바로 제이슨 본 시리즈다.
본드, 제임스 본드 (Bond, James Bond)의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무방한 제이슨 본 (Jason Bourne)은 현실적이고, 안타깝고, 무엇보다 정말 혼자다. 화려한 장치도, 위트 있는 농담도 없다. 그는 늘 도망치고, 맞서 싸우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나는 정기적으로 제이슨 본 시리즈를 다시 본다. 남의 나라를 때려 부수고 다니는 설정은 여전히 불만이지만, 극단적인 스파이의 한 형태인 ‘암살자’가 지닌 이중적인 고뇌를 비교적 온전히 그려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수작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