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추천 아님
폭풍 같던 작년을 보내고, 새해가 시작되며 이런저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읽는 동안에는 그저 담담한 이야기들 같았는데, 시간이 흐르니 마음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그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짧게나마 감상을 남겨 본다.
<뉴로맨서> Neuromancer 윌리엄 깁슨
정치인 안철수는 2012년 대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윌리엄 깁슨의 문구를 인용한 적이 있다. 그는 평소 윌리엄 깁슨을 좋아했다고 한다.
"미래는 이미 여기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안철수는 이 문장을 인용하며 기세 좋게 출마 의지를 밝혔다. 당시 꽤 회자되었던 이 문구 덕에, 나는 윌리엄 깁슨을 알게 되었고, <뉴로맨서>를 읽게 되었다
십여 년 만에 이 소설을 다시 꺼내게 된 것은, 현대자동차가 올해 CES에서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통해 선보인 관절형 구체 로봇 쇼를 보았기 때문이다 - 그 쇼는 미래는 이미 여기와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나는 새삼 윌리엄 깁슨은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1990년대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SF 장르가 다루어온 기술적 상상력과, 그에 겹쳐지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이 한 편의 소설 안에 구현해 냈다.
설령 그것이 1980년대에 이미 등장한 개념들이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하나의 지도처럼 정교하게 맵핑해 통합된 세계로 직조해 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렇기에 따라가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인간의 신체와 네트워크를 매개로 현실과 사이버 공간을 오간다는 설정 때문인지, 소설을 읽는 내내 매트릭스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킬 빌의 이미지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육백만 불의 사나이와 소머즈까지. (나는 대체 언제 적 세대인 것일까.)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도 떠오르고, 공각기동대의 장면들은 한편에서 반복된다. 그 시절의 스타였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데몰리션 맨 역시 특정 장면에서는 이상할 만큼 잘 어울린다. (책을 읽다 보면 오호라 싶다.)
심지어 맨 인 블랙 3의 선글라스를 쓴 외계인이 추락하던 장면은 이 책에서 영감을 받은 게 확실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리고, 데이빗 린치와 드니 빌뇌브의 듄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된다.
그렇다, 뉴로맨서는 SF계의 트러플맛 프리미엄 한우차돌해물 짬뽕 같은 소설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 나지브 마흐푸즈
영어 제목은 Children of the Alley이고, 이집트 원제는 Children of Gebelawi다. 말 그대로 ‘제벨라위의 아이들’이라는 뜻이다.
‘은비까비의 옛날옛적에’나 ‘무도사 배추도사의 옛날옛적에’를 떠올리게 하는, 어딘가 전래동화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제벨라위 집안의 흥망성쇠가 “그 골목”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나는 대체 어느 세대인 걸까?!)
전래동화를 닮았다고 느꼈는데, 실제로도 이 작품은 알레고리 소설로 분류된다. 비유와 은유, 우화를 통해 교훈과 질문을 던지는 형식.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빌려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다.
그러나 전래동화라 하기에는 서늘하다. 그 서늘함 속에서 주인공들의 고통은 더 냉정하고 단호하게, 읽는 이를 비탄에 잠기게 한다. 예컨대 ‘콩쥐팥쥐’에도 가혹한 결말은 존재하지만, 이 소설이 품은 비탄은 선악의 응징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옳았노라, 틀렸노라, 섣불리 판단할 수 없게 만드는 종류의 침묵이 소설 전반에 흐른다.
이 특별하고도 심오하며 쉽게 해석되지 않는 심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제벨라위에게서 출발한다.
창조주가 아담과 이브를 에덴에서 내쫓았듯이,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들의 신이 침묵했듯이,
아브라함의 신이 이삭을 제물로 요구했듯이,
고래 뱃속에서 고생하는 욥을 그대로 두었듯이,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를 불렀을 때조차, 그저 침묵했듯이,
공고한 성벽 안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제벨라위는 그저 지켜본다.
자손들의 반복된 망각을.
<새로운 인생> 오르한 파묵
‘좋아하는 것’을 말해보라 하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한동안 머뭇거리게 된다. 많은 순간,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작가’를 꼽으라면 비교적 자신 있게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오르한 파묵은 그중 한 사람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낡은 고속버스들의 반복된 사고와 함께 소설은 이어진다. 사람들이 죽는다. 누군가는 울부짖고, 누군가는 피를 흘리며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른다. 누군가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를 잃는다. 터키의 현대사는 마치 깨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산산이 흩어진다.
작품 속에는 어떤 “책”이 끊임없이 언급된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보여주고, 그 삶으로 매혹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책. 그 책을 읽은 주인공은 살아남는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 역시 살아남는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사람들을 다른 삶으로 이끌며 과거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그 책은 끝내 남는다. 새로 태어난 고속버스들로 가득 찬 고속도로에서는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더는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아도 된다.
과거와 현재 — 역사의 일부로 존재하는 개인,
남자와 여자,
살인자와 희생자,
젊음과 늙음,
순응과 반항,
서구와 동방.
양립하도록 설계된 세계의 양면을 파묵은 조용하고도 아름답게 풀어낸다. 그것은 단어가 유난히 화려해서도, 문장이 길어서도, 수식어가 많아서도 아니다. 지나치게 감상에 기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설명하기 어려운 균형 감각이야말로 재능일 것이다. 나는, 나에게는 없는 그 재능을 존경한다.
<코마로프 파일> 프레드릭 포사이스
아마 초판 1쇄를 마지막으로 절판된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의 원제는 Icon이다. 동방정교회에서 종교적 상징물을 뜻하는 바로 그 ‘이콘’이다. 한국어 제목은 훨씬 직접적으로 소설의 내용을 드러낸다.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작품인 만큼 이야기는 매우 재밌다. 굉장히, 너무, 무척이나 재밌다. 혹평도 있지만, 그는 아마 개의치 않을 것이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그저 잘했던 것뿐이니까.
시대적 배경 또한 흥미롭다. 소련 붕괴 이후, 고르바초프를 거쳐 옐친 정권에 이르는 러시아. 그리고 1999년 옐친이 사망했다는 가설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이 쓰일 당시는 1996년 경으로 옐친이 살아 있었다).
가상의 러시아에서 기묘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가 서방으로 흘러들어 간다. 은밀하게 준비되었을 계획이 어떻게 외부로 새어나갈 수 있었을까. 소설은 그 과정을 특유의 건조하지만 엄청난 디테일로 풀어낸다. 붉은 눈꽃 문양이 파란 배경 위에 새겨진 군복을 입은 한 섬나라 출신의 군인, 그리고 그가 건넨 맥주 한 병. 사소해 보이는 그 장면 하나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가난과 몰락 속에 남겨진 노인의 손에 ‘그’ 시나리오를 쥐게 한다.
거대한 권력의 음모는 그렇게, 때로는 사소한 인간적 접점 하나에서 균열을 맞는다.
“공작”이라는 단어가 있다. 제조업에서도 쓰이고, 학창 시절에도 심심치 않게 들었던 말이다. 무언가를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행위.
그러나 첩보의 세계에서의 공작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치밀하게 설계된 기만의 계획이 그것이다.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그 공작을 설계한 사람만이 안다. 영국 해외정보국 국장 출신의 한 노인, 오직 그만이 알고 있던 바로 그 계획.
그것이 구상되기까지의 배경과 설계 방식, 그리고 그 결과가 두 권에 걸쳐 펼쳐진다. 길지만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스릴 있고 체계적이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전개된다.
+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작품은 국내에 번역된 것들 가운데 오데사 파일을 제외하면 대부분 읽은 듯하다. 작품마다 특징이 다르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흥미롭다. 그는 첩보와 공작을 다루는 장편뿐 아니라 일상을 배경으로 한 단편에서도 특유의 건조한 위트를 놓치지 않는다. 나는 ‘제왕’이라는 단편을 특히 좋아한다. <노인과 바다>의 휴양지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면 다음과 같다.
이청준
오르한 파묵
톨킨
오에 겐자부로
애거서 크리스티
움베르토 에코
박찬용
뭐야, 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