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와 재조합이라는 야만적인 추적을 통해 엿본 순수문학의 실패
콜라주 Collage는 별개의 조각들을 붙여 모아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미술 기법 – 나무위키의 설명.
집에 책이 많은 편이라 현관 바로 옆에도 폭이 좁은 책장이 있다. 그마저도 겹으로 책이 쌓여있다. 눈이 닿는 위치에 열린책들 30주년 기념판 소설들이 쌓여 있다. 기념판답게 몇 쪽이 되든 한 권으로 제본된 소설들. 그중에서도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그 두께와 제목에서 눈에 띄었지만 작가 이름을 보면 왠지 외면하고 싶었다. 그렇게 수년을 못 본 척하던 중 한 온라인 독서모임에서 보르헤스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라는 책을 올해부터 같이 읽게 되었다. 보르헤스는 남미라는 거대한 정의 안에서 아르헨티나인의 개별적 정서를 그의 언어로 분리하여 이야기한다. 그렇게 갑자기 남미에 대한 책을 우르르 보게 되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도.
소설은 1976년, 멕시코에서 길을 잃은 멕시코인들이라는 한 소년의 일기로 1부가 시작된다. 2부는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로 구성된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부제이다. 3부, 소노라의 사막들은 다시 처음 그 소년의 일기로 돌아온다.
소설은 마치 콜라주 같다. 패턴을 찾기 어려운 여러 인물들이 번갈아 등장하고, 새로 추가되며 찾을 수 있을 듯 말 듯한 패턴 주위를 머물며 이야기는 이어진다. 1976년부터 1996년까지의 패턴 찾기. 사실 패턴은 없었다. 사람들이 있을 뿐이고, 그들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수많은 인물들은 특정되지 않은 어떤 것의 주변을 뱅뱅 돈다. 그들의 생각과 대화와 독백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울리세스 리마와 아르투로 벨라노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이어지는 방식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 흩어진 수많은 직선들이 뻗어나가다가 맺어지는 점들의 합과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은 모자이크가 아닌 콜라주 같은 이야기라 생각했다. 언제, 왜 이렇게 된 거지 싶을 때 완성되는 그림들의 집합.
그림이 이해와 감동의 대상이라는 전제하에 나는 피카소의 그림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감동해 본 적도 없다. 왜 여자의 얼굴을 조각조각으로 그린 것이며, 벽을 덮은 길고 긴 게르니카의 조각난 인물들과 동물들의 서사를 보면서 난 무엇을 이해해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나만 이해 못 하는 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해 못 한다고 해서 손해 보는 건 없다.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계속 생각하며, 이해 못 해서 손해 볼 게 없었던 피카소의 그림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은 결국 완전한 이해는 어렵지만 감은 잡힌다, 이 정도의 얘기이다.
피카소 그림을 조각난 일부들의 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처럼 울리세스 리마와 아르투로 벨라노와 함께했던 인물들의 조각난 생각들은 그 둘을 해체하고 재조합한다. 여전히 우리는 그 둘이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가 없다. 재조합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통해 그들의 삶을 추적할 뿐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그 둘과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이 아니라 독자들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추적해 보라며 힌트를 계속 던져줘도 내장 사실주의에 탐닉한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독자인 우리들(나).
쓰다 보니 패턴이 보이지 않던, 정의되지 않은 그 무엇이 내장 사실주의였나란 생각이 든다. 책의 도입부터 언급되는 내장 사실주의를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다 읽고 난 다음에야 동물 체내에 존재하는 장기들을 뜻하는 “내장”에 사실주의를 빗대었나 짐작해 본다. 남미 문학, 멕시코 문학이 이르고자 한 극단의 순수성에 대한 비유가 내장 사실주의라고 해석되는 것 같다.
내장 사실주의의 본질을 찾아 멕시코를 가로지르던 칠레인 아르투로는 로베르토 볼라뇨 본인의 분신이자 그가 좋아했던 랭보의 이름에서, 멕시코인 울리세스의 이름은 율리시즈에서 (이건 확실치 않지만) 따왔다. 작가는 그가 추구한 남미 문학의 순수성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리스 고전과 초현실주의의 조합에서 찾으려고 한 걸까- 불행히도 난 두 분야에 지식이 매우 얕다. 만일 그러하다면 작가가 취한 인물들의 해체와 재조합은 그 구상에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요즘 집착하는 것은 글에 담긴 글쓴이의 함유량이다.
누군가의 글은 그의 모든 걸 담는 것인가, 그의 일부를 담는 것인가, 그의 최선을 담는 것인가, 최선의 일부분만 담는 것인가, 그 최선이라 함은 어느 정도의 최선인 것일까, 그 일부분이라 함은 백분율 기준으로 어느 정도 되는 것일까?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담긴 로베르토 볼라냐의 함유량은 100%인가, 그의 최선의 아주 일부인가. 그가 조각내서 보여준 인물들을 통해서는 감히 유추가 불가능해서 계속 이 의문을 가지게 된다.
- 같다, 그런 것 같다는 표현을 쓰는 걸 싫어하지만 문학이란 그런 것 같다. 정의되지 않은 어떤 것, 그래서 그 누구나 스스로의 정의를 만들 수 있는 어떤 것
- 소설에 쓰인 글자의 나열이 거칠다 싶을 때 마법처럼 아름다운 문장들이 나타난다. 아래처럼.
마리아는 홀로그램 투사체처럼 멕시코 시티의 밤하늘에 기적처럼 나타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걸음걸이부터가 우아했고, 버스 정류장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될 순간을 미루려고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듯 아주 천천히 걸었다. 어느 구간에서는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리아는 별 이름을 하나하나 말했다) 걸었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르투로가 내게, 자신은 별 대신 아파트에 켜진 불, 베르사예스 가나 루세르나 가나 론드레스 가의 옥탑방처럼 작은 아파트들의 불빛을 보았노라고, 그 순간 그 아파트들 중 하나에 나와 함께 살면서 부카렐리 가의 노점상에서 파는 크림 샌드위치로 저녁을 먹으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노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 그는 그런 이야기 대신(했다 해도 내가 미친놈 취급했을 것이다) 내 시를 읽어 보고 싶다고, 자신은 북반구와 남반구의 모든 별을 예찬한다고, 내 전화번호 좀 달라고 말했다.
어쨌든 나는 항상 아르투로가 하는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고는 했다. 이 자식 머리에는 어쩌면 이렇게 멍청한 생각만 떠오르지, 어떻게 이런 바보 같은 일들을 믿는 거야. 그러다 어느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모든 것이 나를 향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이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나를 버리지 마, 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봐, 내 곁을 떠나지 마. 그때 아르투로가 속속들이 개자식임을 깨달았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과 남을 속이는 것은 천지 차이이기 때문이다. 내장 사실주의 전부가 사랑의 편지이고, 달빛 아래 있는 멍청한 새의 광기 어린 잘난 척이고, 뭔가 천박하고 하찮은 일이었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닌데.
만세. 지나간 시절을, 밤이 밤 속으로 침잠하던 그 순간의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위가 쓰려 왔다. 하얀 발이 달린 멕시코시티의 밤은 결코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 없다. 이제 온다, 이제 온다 하고 지치도록 예고하지만 밤은 늦게 찾아온다. 마치 밤이라는 그 사악한 여인도 석양을 관조하고 있는 듯이, 멕시코의 축복받은 석양을 관조하고 있는 듯이, 세사레아가 이곳에 살고 우리 친구였을 때 말하던 것처럼 공작새 석양을 제자리에 멈춰 서서 관조하고 있는듯이. 그러자 디에고 카르바할의 사무실에 있는 세사레아가 눈에 선했다. 자기 책상의 빛나는 타자기 앞에 앉아, 장군이 자기 방 안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보통 그곳 안락의 자에 앉거나 문에 기대어 시간을 죽이는 장군의 경호원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이.
- 소설의 25장은 슬펐다. 죽을 걸 알면서도 산다는 인간의 뒷모습이 남겨져 있어서 슬펐다.
벨라노가 차창을 통해 안개와 햇빛 사이에 갇힌 숲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아름답잖아. 나는 벨라노에게 왜 로페스 로보를 따라가려고 하는지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혼자 놔두지 않으려고. 그건 벌써 알고 있었기에 다른 답, 뭔가 결정적인 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벨라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슬펐다. 뭔가 더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윽고 우리는 셰비에서 내려 길쭉한 집에 되돌아왔다. 벨라노가 자기 물건을 집어 군인들과 스페인 사진 기자와 함께 나갔다. 나는 문까지 벨라노를 따라갔다.
장피에르가 나와 나란히 걸으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벨라노를 바라보았다. 군인들은 이미 멀어져 갔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안녕을 고했다. 장피에르는 벨라노와 악수를 하고 나는 포옹을 했다. 로페스 로보가 저만치 앞서 갔다. 장피에르와 나는 로페스 로보가 우리와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윽고 벨라노가, 마치 부대가 자기를 놔두고 떠나 버리리라는 것을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사람처럼 뛰어가 로페스 로보를 따라잡았다. 두 사람이 마치 소풍 가듯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공터를 지나 울창한 숲으로 사라졌다.
* 책 속의 구절은 문제 시 삭제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