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빗댄 삐딱함의 극대화
2024년 8월 작성한 내용을 수정하여 올려본다.
제목에 속아서 본 책인데 의외로 기억에 남았다. 읽을 때는 변태 소설인가,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책의 절반을 지나는 동안까지 함께 했지만, 나머지 반을 읽으면서는 아, 이게 그런 내용인 건가 하면서 즐겁게 읽었다. 진짜로 즐거운 부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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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해체와 재구성. «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 가 얘기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겠는가? 하는 여러 의견 중 하나이다.
몇 개의 에피소드들이 기묘한 관계로 엮여있는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를 절반을 읽어가면서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 읽은 지금도 제대로 읽은 게 맞긴 맞나 싶다.
앞부분을 읽다 보면 하루키가 생각난다. 아 또 이런 소설인 걸까…? 작가가 하루키랑 나이대도 비슷해서, 그 세대는 이런 부유한 룸펜 도련님풍 취향의 진열에 삐딱함과 낭만을 섞은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게 일종의 취미 생활이자 유행이었나? 한참을 생각했다.
대체 무슨 소리야 하며 절반을 넘게 읽어내니 내 오해였음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낭만을 빗댄 삐딱함의 극대화가 어울린다. 일본의 어느 세대가 축적해 놓은 그럴듯한 문화적 취향에 대한 삐딱함을 야구를 빌어 극대화했다. 야구를 이용한 것 자체가 삐딱하다. 이럴 때 쓰는 그럴싸한 문학용어가 있던데… 모르니까 넘어갑니다.
1872년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야구는 1896년 새로 창설된 일본 야구팀이 미국을 이기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비약하자면 이 경험이 일본이 1941년 진주만을 공격할 수 있었던 요인 중 일부일수도 있지 않을까. 1896년 미국야구팀의 콧대를 눌러놓은 것처럼, 일본은 전쟁에서 미국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1945년에 미국에 항복하며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결국 미국을 벗어나지 못했다.
패전 후 태어난 일본의 전공투세대에 속하는 작가는 그의 첫 책을 통해 실제로는 우아하지는 못해도 감상적인 전공투세대가 가질 수 없었던 (누구나 본인이 갖고 있지 않은 걸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현대화된 일본의 기묘하게 뒤섞여버린 문화와 취향을 기묘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기묘하게 시작해서 기묘하게 끝나지만 기묘하게스리 알듯 말듯한 무엇인가를 머리 안에 남겨놓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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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테스크하고 혐오스러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런 풍을 싫어한다면 안 보는 게 좋다.
내 경우에는 저자가 불쾌하다 싶은 특정감정들을 유발하는 문장을 문자 그대로 “제작”하여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불쾌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 저자의 다른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지 어언 7개월이 지났다. 이제 읽어봐야겠다.
- 작년에는 일본 소설과 수필을 많이 읽었다. 올해는 중국 소설과 수필을 많이 읽고 싶다. 아랍의 문학도. 그리고 이청준의 소설들도.
-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처럼 나도 우아하고 감상적인 나만의 후기를 계속 남긴다. 우아하고 감상적이지 않았다면... 내 책임이니까 어쩔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