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시피버닝 Mississippi Burning

그리고 어느 소설가의 우아한 인간 모순의 고백 - 가버린 부르조아 세계

by 마나스타나스

잊지 않기 위해 다시 보는 영화가 있다. Mississippi Burning 미시시피 버닝도 그중 하나다. 이 영화를 특별히 좋아해서라기보다, 잊지 말아야 할 감정과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 몇 년에 한 번씩 찾아본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영화는 흑인 차별이 숨쉬는 것처럼 당연했던 1964년 미시시피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흑인 인권운동가 세 명이 실종되고, FBI가 수사에 나선다. 그 마을의 백인 위정자들과 주민들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흑인들에게 린치를 가해왔다. FBI 요원이 흑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 흑인은 표적이 된다. 협조하면 죽는다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KKK 백인 무리들은 정체를 숨기지 않는다. 변명도 없다. 당연하다는 듯이 움직인다. 그 뻔뻔함이 놀랍지 않다.


“What’s wrong with these people?”

FBI 수사 책임자인 앨런 워드는 린치를 당한 흑인 청년을 껴안으며 그렇게 묻는다. 그의 표정은 망연자실하다.


“증오심은 후천적인 거예요.
어린 시절부터 학습되면 사실로 믿게 돼요.
증오심도 믿게 돼서 매일 그 안에서 살아가게 돼요.”

KKK 멤버인 보안관의 아내, Mrs. Pell의 대답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20여 년 전, EBS 명화극장에서였다. 중간부터 봤지만 메시지는 강하게 남았다.

Mississippi Burning은 "불의"에 대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린치, 인종차별, 백인우월주의는 그 자체로 악하다. 그러나 영화가 묻는 건 ‘어떻게 그런 믿음이 생겼는가’이다.

차별 당해 마땅하고, 린치를 당해 마땅한 흑인들. FBI 대화를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죽일 이유가 된다.


Mrs. Pell의 말처럼, 이 영화는 주입된 분노, 학습된 증오, 정당화된 잘못된 신념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KKK가 폭력과 살인을 신념으로 포장하며, 변명하지 않는 모습이 놀랍지 않았다.


1964년 미시시피의 이야기는 과거로만 남아 있지 않다. 학습된 분노는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다. 유튜브나 페이스북을 켜기만 해도, 누군가를 향해 “그건 네 탓”이라며 “자업자득”이라고 말하는 영상들이 쏟아진다.


Mississippi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전세계가 휘말리던 때, 아프리카는 방치되었다. 전유럽은 전체주의에 맞서야 했고, 역대급 풍요로움이 선사한 평화를 뒤로한 미국의 방패는 아프리카까지 닿지 못했다. 링컨의 노예 해방운동은 자유는 보장하지 못했다.


그렇게 잊혀진 아프리카 남단, 남아연방의 백인들에게 아파르트헤이트는 계급도, 차별도, 폭력도 아닌 각자가 타고난 운명이었다. 때문에 유럽 대륙의 선조들이 남긴 계급과 차별의 폭력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남아연방의 백인들에게 흑인들의 평등 요구와 봉기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인종은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 정해지는 신의 섭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죽었다. 그는 그들을 위해- 민중을 위해 죽지 않았다. 아마 그 이상의 것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다가 배신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자존조차 잃었다. 그는 사랑하려는 노력에 모든 것을 걸었고 또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있는 모든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주었다. 그리고 바다의 침상으로 내려가는 일이 마지막이었다. (가버린 부르조아 세계)
물론 그의 친구들인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사실과 우리의 정치적 개인적 견해에서 그가 죽은 이유를 규정해 버렸다. 그가 죽도록 아팠었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일지 모른다. 그를 영원히 추방했던 조국, 아프리카 대륙의 그의 출신국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원주민의’ 옷을 조롱하듯 입고 혼자서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던 조국에 대한 향수로 죽을 만큼 아팠을지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흑인주의의 유대가 그가 전에 남아연방에서 백인의 우정에 의지했던 것을 돌이켜보게 만든 수치 때문에 죽도록 아팠을지 모른다. 그를 죽인 것은 남아연방정부였고 문화의 충격이었다 (떠오르는 아프리카)


나딘 고디머의 단편집 가버린 부르조아 세계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마주한 인물들의 모순을 우아하고 세련되게 고백한다. 고디머의 인물들은 죄책감을 고백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까지다. 그 이후는 각자의 몫이다.”


이 거리감은 내가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를 접할 때 느끼는 괴리와 닮아 있다. 나딘 고디머는 죄책감의 고백을 생략함으로써, 말 또는 생각만으로 언급되는 인종차별에 대한 그 모든 비판은 허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 인종차별의 역사는 계급의 역사이다. 인간이 지금의 형태로 역사에 존재하는 한 차별은 형태만 바꾸어 살아남을 것이다. History doesn’t repeat itself but it often rhymes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운韻을 따라 변주하기 때문이다.


+ 백인이 만든 인종차별 콘텐츠는 겉과 속이 따로 노는 만두 같다. 맛을 알기 어렵다. 반면 흑인이 만든 콘텐츠는 5배로 압축한 안경알 같아서 빙빙 돌아 그 핵심에 닿기 어렵다. 이 간극은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 우라사와 나오키의 마스터 키튼은 가장 좋아하는 만화이다. 그의 만화를 보다 보면 (나는) 항상 동일한 주파수대에서 미묘한 거슬림이 생긴다. 인종차별을 다룬 콘텐츠에서 느끼는 그 미세한 불편함과 비슷하다. 이건 죄책감의 고백일까, 죄책감의 위장일까 싶은 것. (그럼에도 나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연재 중인 작품의 결말은 꼭 봤으면 싶다.)


(덧붙임) 최근 진 해크만이 세상을 떠났다. Mississippi Burning을 포함해 그가 출연한 영화들이 많다. 프렌치 커넥션, 크림슨 타이드,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조연으로 나왔던 야망의 함정, 노 웨이 아웃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선명했다. 1930년생, 2025년 사망. 멋진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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