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hin red line 씬 레드 라인

삶과 죽음, 광기와 인간성의 경계를 가르는 가늘고 붉은 선

by 마나스타나스

1943년생 테렌스 말릭은 보기 드문 궤적을 지닌 감독이다.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단 9편뿐이다. 적은 수작에도 불구하고, 영화사에서 그의 위치는 결코 작지 않다.

2011년작 <The Tree of Life>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말릭 특유의 철학적 영상미를 세계에 알린 대표작이다.


말릭에게는 오래된 소문이 하나 있다. "20년에 한 번 영화를 만든다"는 말이다. 실제로 1998년작 <The Thin Red Line>은 <Days of Heaven>(1978) 이후 정확히 20년 만의 복귀작이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한다.


드물게 영화를 만들고, 더욱 드물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테렌스 말릭의 <The Thin Red Line>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작품이었다. 뒤늦게 마주한 이 영화는 생각 이상으로 강렬했다.


<The Thin Red Line>은 1944년 과달카날 전투를 배경으로, 전쟁이라는 집단적 광기 속에서 인간성의 붕괴와 실현을 동시에 조명한다. 한없이 평화로운 남태평양의 자연과 대비되는 살육의 장면들은 전쟁의 무의미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The Thin Red Line’이라는 표현은 1854년 크림 전쟁 중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유래한다. 붉은 제복을 입은 영국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러시아군에 맞서 방어에 성공한 사건으로, 이후 ‘얇고 붉은 선’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는 방어선을 상징하게 되었다.

한편 이 영화에서의 The thin red line은 물리적 전열의 의미를 넘어, 삶과 죽음, 광기와 인간성의 경계를 가르는 은유로 확장한다. 전쟁이라는 집단적 폭력 속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인간일 수 있으며, 왜 인간이어야만 하는지 그 경계의 붉은 선 위에서 질문한다.


장군 진급에 실패한 대령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자신의 결정을 끊임없이 합리화한다 - 전쟁에서 죽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밀려난다는 것의 의미를 젊은 당신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이 전투에서의 승리가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 그에게 병사들의 생명은 스스로의 실패를 덮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신이시여, 제 병사들을 배신하지 않게 해 주소서.” 기도하던 중대장은 결국 냉혹한 전장의 현실 앞에 병사들을 내보낸다. 병사들은 한순간에 몰살당하고, 총알 앞에서 생명은 무력하다.


장교 출신이지만 사병으로 다시 징집되어 과달카날까지 오게 된 잭은 전투 내내 평화로운 고향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하던 순간들을 그리워한다. 그 기억만이 끝없는 살육 속에서 자신을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선임 상사 웰시는 만사 비정하리만치 냉소적이다. 모두가 광기에 물드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그의 감정을 가둬두는 벽을 만들고 감정을 단단히 걸어 잠근다. 전우애도, 사랑도, 인간성도 철저히 밀어내며 자신만의 방어벽 속으로 숨는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쓰는 병사가 있다. 바로 일병 위트다. 위트는 이 영화의 중심 주제인 인간성과 전쟁 사이의 경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Maybe all men got one big soul everybody's a part of, all faces are the same man. One big self. 모든 인간은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트의 독백은 신이 창조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자기 파괴성 사이의 간극을 묻는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저격수 잭슨은 적을 조준하며 신을 찬양한다. 같은 신이 양쪽 모두에게 살인을 허락한다. 신의 무관심은 전쟁의 또 다른 이름이다.


Are you righteous? Kind? Does your confidence lie in this? Are you loved by all? Know that I was, too. Do you imagine your suffering will be any less because you loved goodness and truth? 당신은 정의롭다고 믿는가? 나도 그랬다. 그러나 선을 사랑한다고 해서 고통이 덜하진 않는다.

고지를 빼앗긴 일본군은 미군의 집중 사격 속에서 죽어가며 묻는다. 총알 앞에서는 적도, 아군도, 신념도 의미를 잃는다. 전쟁의 규칙은 단순하다. 먼저 쏘는 쪽이 살아남는다.


영화의 마지막, 위트는 일본군의 총앞에 선다. 항복도,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 그는 끝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다.


<The Thin Red Line>이 개봉했던 해,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내놓았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미국식 감동 서사가 예상된다. 톰 행크스가 중앙에 등장하는 포스터만 봐도 서사는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내 예측은 언제나처럼 빗나갔다.


영화 초반, 노르망디 상륙 장면은 전장을 압도적으로 재현하며 처참하고 절망적인 충격을 안겼다. 해안가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병사들은 쓰러진다. 전장은 생존의 의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전쟁의 참혹함 앞에서 감정을 소비하는 일은 사치스러운 행위다. 전장을 경험하지 않은 이가 흘리는 눈물은, 그 고통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볍다. 그럼에도 나는 전쟁 영화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2022년작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독일인의 시선으로 1차 세계대전을 다시 그린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고통스러웠다. 한겨울 참호 속에서 병사들은 발이 젖은 채 굶주린다. 평범한 삶을 살던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전선에 내몰려 죽어간다. 17세 소년도, 30세 인쇄공도, 독일군도, 프랑스군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얼굴조차 모른 채, 몇 백 미터의 땅을 두고 싸우다 죽는다. 이 전쟁으로 1,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엇을 위한 전쟁이며,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나.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난 20세기가 지나고, 평화를 약속했던 21세기가 시작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위정자의 욕망은 디지털화되었고, 전쟁은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사람들은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따지지만, 죽음 앞에서는 모든 해명이 공허하다. 누군가는 여전히 죽는다.


실시간화된 전쟁은 인간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전쟁 뉴스는 유튜브 라이브처럼 소비되고, 더 이상 인간적인 감정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공감 대신 피로가, 분노 대신 무관심이 자리잡는다.


총은 인간을 비겁하게 만들었다. 칼과 도끼로 싸우던 시절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총은 거리를 둔 채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었고, 인간은 그만큼 용기로부터 멀어졌다. 비겁함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제는 전장에 서지 않아도 된다. 드론은 수천 킬로미터 밖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키보드는 타국의 기반 시설을 마비시킨다. 전쟁은 점점 현실에서 지워지고, 가상 속으로 들어간다. 전쟁이 ‘현실의 일’이기를 멈추자, 사람들은 관심을 거뒀다. 너무 비현실적이고, 너무 일상적인 뉴스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전쟁 영화를 찾아 본다. 전쟁 다큐멘터리를 보고, 전쟁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은 나에게 그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일깨운다. 시대는 비겁해지더라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지나간 시대의 전쟁과 그 전쟁이 남긴 현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The Thin Red Line의 출연진은 호화롭다. 2시간 반이 넘는 러닝타임 속, 몇몇 배우는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출연을 마다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들의 선택이 충분히 이해된다.


짐 커비젤의 고요하고 순수한 연기도 좋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강하게 남은 인물은 닉 놀티다. 진급에서 수차례 밀려난 선임 대령의 광기에 가까운 집념을 닉 놀티는 처절하며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그의 존재는 이 영화의 무게를 뒷받침한다.


영화는 남태평양의 찬란한 자연과 전쟁의 참혹함을 대비시킨다. 이 상반된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데에는 음악의 몫이 크다. 한스 짐머의 사운드트랙은 단조롭지만 장엄하게 두 세계의 간극을 잇는다. 그의 음악은 이 영화의 깊은 정서를 완성한다.


이 영화를 생각할수록 하나의 확신에 도달한다. 인간이 남긴 어떤 위대한 흔적은 굳이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설명 없이도 그 자체로 충분한 작품이 있다. 상을 받지 않아도, 그저 존재함으로써 누군가에게는 위안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성찰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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