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
“매니저님, 플루토 보셨어요? 그거 꼭 보세요.”
전 직장 동료가 넷플릭스에 올라온 우라사와 나오키의 애니메이션 『플루토』를 꼭 보라며 권했었다. 그때는 미뤄두었지만, 이제야 보게 되었다. 역시, 우라사와 나오키로군.
하데스와 플루토는 같은 존재이다.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지옥의 신이자, 동시에 풍요를 가져오는 신.
‘하데스’는 그리스어로 지하세계를 뜻하지만, 신과 장소의 이름이 함께 쓰이며 혼란이 빚어지자 로마시대에는 ‘플루톤(Plouton)’, 즉 “넉넉하게 만드는 자”로도 불리게 된다.
하데스가 지상에 올라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아름다운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지하세계의 여왕으로 삼았다는 것, 그녀가 어머니 곁으로 돌아올 때는 아름다운 봄과 여름이, 남편 하데스의 곁으로 돌아갈 때는 데메테르의 슬픔으로 가을과 겨울이 온다는 아름다운 신화는 사실 계절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죽음과 생명의 경계에 대한 비유이며, 『플루토』의 세계관과 닮아 있다.
꽃을 피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사하드
스스로와 같은 로봇을 파괴하고 지구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플루토
- 양면을 가진 둘은 결국 같은 존재인 동시에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로봇은 인간을 모방해 생명을 해치거나 지킬 수 있는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A.I.』에서 로봇 데이빗은 인간 아이처럼 시금치를 삼키려 한다. 하지만 소화기관이 없어 그대로 녹아내릴 뿐이다.
- 그 행동은 인간적인가, 아니면 인간을 흉내 낸 기능일 뿐인가?
- 진짜와 모방의 경계는 애초에 존재하는가?
『플루토』는 창조와 파괴의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존재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윤리적 판단과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존재다.
그 점에서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답다.
게지트(Gesicht)는 독일어로 ‘얼굴’을 의미한다. 그는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로봇이며, 감정을 느끼도록 설계된 기계다. 죄책감, 기억의 압박, 두려움 같은 반응을 보이며,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정서적 반응이다.
인간은 기억을 자연스럽게 망각할 수 있다. 반면, 로봇은 정보를 삭제해야만 한다. 기억으로 저장된 정보는 의도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며, 삭제 이후에도 흔적은 남는다. 컴퓨터 하드디스크처럼, 삭제된 데이터의 잔여 정보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감정과 비슷한 반응을 만들어 내고 이는 죄의식으로 이어진다.
『플루토』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플루토는 애초에 99억 인류의 표정을 반영해 감정 알고리즘을 설계한 로봇이었다. 그러나 감정의 균형만으로는 작동하지 않았다. 그는 깨어나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지만 감정의 극단 ― ‘슬픔’, ‘증오’와 같은 한쪽으로 기운 정서가 주입된 뒤에야 플루토를 작동할 수 있었다. 감정의 완전한 균형이 아닌 치우침이, 오히려 존재를 깨우는 시작이었다.
이는 아톰에게도 반복된다. 플루토와의 전투 이후 의식을 잃은 아톰은 깨어나지 못한다. 덴마 박사는 플루토에게 주입되었던 것과 같은 특정 감정을 주입한다 - 감정은 단지 반응이 아니라, 생명과 의식의 작동 조건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를 떠오른다. 그는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기계는 눈물을 흘릴 수 없지만, 그것이 감정이라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감정은 기능이 아니라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감정을 느끼는 로봇은 인간의 ‘혼네(本音, 본심)’와 ‘다테마에(建前, 겉마음)’ 구조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인간은 감정을 숨기거나 지울 수 있지만, 로봇은 설계된 대로 반응하고, 흉내를 내는 과정에서 감정을 학습하게 된다. 결국, 그 감정을 스스로 ‘진짜’라고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이 과정을 통해 로봇은 인간이 점차 잃어가고 있는 감정 구조와 윤리적 반응을 되짚는다. 아기가 부모를 통해 인간다움을 배우듯, 로봇은 모방을 통해 감정을 익히고, 감정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플루토』의 로봇들은 인간처럼 사고하고 사랑하지만, 망각의 기능은 갖고 있지 않다. 망각은 인간이 진화를 거치며 형성한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이며, 어떤 면에서는 선택적 이기심의 산물이기도 하다.
게지트 Gesicht는 자신이 죽인 자의 얼굴을 잊지 못하고, 그 기억에 의해 사고 회로가 흔들린다. 이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A.I.』 속 로봇 소년 데이빗이 어머니의 사랑을 기다리며 영원히 멈춰 있는 모습과 겹쳐 보인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을 희미하게 만들 수 있지만, 로봇은 데이터를 삭제하지 않는 한 그 기억과 감정을 계속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플루토』의 로봇들은 지우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감정이라는 것이 단순한 코드가 아닌 삭제 불가능한 반응이라면, 로봇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복잡하고 무거운 정신 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데이터로 남은 기억 속에서 감정을 체득하고, 죄를 자각하며, 그 무게를 배운다. 설령 그것이 결국 자기 소멸로 이어질지라도.
『플루토』의 로봇은 감정은 기능이 아니라 존재의 증거라고 얘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플루토』의 세계는, 현실의 이란이 아닌 ‘페르시아’라는 이름으로 존속한 가상의 제국을 배경으로 한다.
다리우스 14세라는 절대 군주 아래,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고 인간에 가까운 로봇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로봇들은 결국 ‘대량살상무기’로 간주되어 제거의 대상이 된다.
그들을 무기로 규정한 이들과, 실제로 무기로 만들어버린 이들. 양쪽 모두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의 불안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자를 악마화하고, 기술과 존재의 존엄성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다. 그것은 『플루토』 속 이야기이자, 우리가 지금도 목격하고 있는 현실의 비극이기도 하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두 대표작, 『몬스터』와 『플루토』는 각각 창조자 역할을 맡은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몬스터』의 닥터 텐마는 요한이라는 존재를 살려낸 뒤, 그가 저지르는 악을 뒤쫓으며 자신의 선택과 인간됨을 끊임없이 되묻는다. 요한은 인간성의 부재 속에서 태어난, 정신이 비어있는 존재로 괴물이 되었다.
반면, 『플루토』의 아톰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덴마 박사가 만든 ‘이상적 인간의 재현’이다. 아톰은 감정과 윤리를 갖춘 존재로, 인간보다 더 도덕적이고 섬세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도구로, 무기로만 인식한다.
요한은 인간이지만 마음을 잃었고, 아톰은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피조물이지만, 그들을 만든 창조자들은 같은 질문 앞에 선다.
"나는 무엇을 만들었는가. 내가 살려낸 것은 무엇이었는가."
우라사와 나오키는 두 작품을 통해 창조자에게 요구되는 윤리, 그리고 창조 행위에 수반되는 책임에 대해 반복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존재를 어떻게 대하고, 또 얼마나 책임질 수 있는지를 묻는 방식이다.
『플루토』는 단순한 SF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로봇이라는 형상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되묻는 윤리적 서사다. 엄마를 위해 먹지도 못하는 시금치를 삼키다 흘려버리는 로봇 아이, 감정을 배우며 눈물을 흘리는 안드로이드, 삭제된 기억의 흔적에 괴로워하는 형사 로봇. 이들은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인가, 기억하는 존재인가. 사랑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파괴하는 존재인가.
『플루토』는 인간을 닮은, 가장 인간적인 로봇들이 하나둘 사라져 갈 때 그 질문을 반복한다.
“우리는 과연, 인간적인 존재인가?”
『플루토』는 데자키 오사무의 『아톰』에 대한 오마주이자, SF 장르가 오랫동안 반복해 온 질문 ― 인간됨의 본질 ― 에 대한 집약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SF가 탐구해 온 거의 모든 주제가 응축되어 있다.
또한 우라사와 나오키는 텐마 박사라는 인물을 통해, 『몬스터』의 닥터 덴마가 끝내 이루지 못했던 과업을 다른 방식으로 완성해 낸다.
+ 혼네와 다테마에. 우라사와 나오키는 전 지구적 세계관을 구축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일본적인 감각을 섬세하게 녹여내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