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기 아까운 콘텐츠 감상기

<미지의 서울> 그리고 <Endeavour>

by 마나스타나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 오늘은 살자.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육상 특기생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다 부상으로 꿈을 접고 방에 틀어박힌 손녀 미지에게 외할머니가 문밖에서 건넨 얘기다. 나 역시 많은 시청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장면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았다.


<미지의 서울>은 내 개인적 배경을 생각했을 때, 각별한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서사는, 한참 벌려놓은 일들로 정신없던 시기에 숨 쉴 틈이 되어주었다.


주인공은 두 명이자 한 명이다. 일란성쌍둥이인 미래와 미지를 배우 박보영이 1인 2역으로 연기하며, 똑 닮았지만 다른 두 인물을 과하지 않게 분리해 냈다. 훌륭한 절제의 연기.


이 드라마가 흥미로웠던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새로운 가족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가족인 듯 가족이 아닌 듯한 관계, 또는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이 되어가는 사람들

- 호수의 엄마는 새엄마이다. 교통사고로 호수는 아빠를 잃었고, 새엄마는 남편을 잃었다. 새엄마에게 있어 호수의 아빠는 추억이지만 호수는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다.

- 글을 못 읽는 식당 사장 할머니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내 일처럼 도와주는 호수와 미지는 할머니에게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두 번째는, 과장 없이 현실에서 각자가 처한 고통의 단면을 보여준 인물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나를 투영하며 위로를 받았다 - 현실의 위로.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해 우울증을 겪고,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해 좌절하고, 나의 결핍이 누군가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 도망치고, 무심코 타인의 상처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극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함께 말이지.


극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을 꼽자면, 배우 류경수가 연기한 한세진이다. 그는 할아버지의 온전한 사랑과 지원 속에서 금융계 최고 자리에 올랐지만, 할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그 뜻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한세진은 미래에게 자신이 쉽게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이유를 말한다. 마음을 준 곳과 떨어져 있으면, 마치 ‘가출’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라고. 그에게 할아버지는 늘 그런 존재였다. 미래 역시, 그에게 다시 ‘가출한 기분’을 들게 한다 - 가출한 기분, 아주 적절하다.

그의 신은 과거와 미래에만 머물지 몰라도, 그는 현재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를 온전히 알 수 없고, 미래는 더욱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이 이제는 괴롭지 않다. 어떤 일은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시간을 지나왔다. 언젠가 쓴 것처럼 이제는 다정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불확실한 미래를 온전히 기대할 수 있다

언젠가 내가 남긴 글, 현재를 살면 된다니까.


+ 90년대 방영했던 만화 중에 "요술소녀, 쌍둥이 자매"가 있다. "새끼손가락 마주 걸고 신비의 세계로 날아간다" - 미래와 미지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서로의 역할을 바꿨지만 90년대의 요술 쌍둥이들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마법을 부렸다. 쌍둥이 소년보다 쌍둥이 소녀들이 확실히 더 뭔가 낭만적이잖아.


영국 드라마 <Endeavour>는 과거 큰 인기를 끌었던 <모스 경감>의 프리퀄로, 젊은 시절의 모스 형사에 대한 이야기다. 옥스퍼드를 졸업한, 가방끈이 꽤나 긴, 성격은 유약한 듯싶다가도 쉽게 부러지지도, 휘둘리지도 않는 Endeavour Morse가 형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최근 시즌 9를 마지막으로 종영했다. 드라마는 Endeavour처럼 유약하면서도 강인하게 9 시즌을 이어왔다.


주인공 Endeavour Morse를 연기하고, 일부 에피소드의 연출도 맡은 배우 Shaun Evans는 Endeavour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I don't see Morse as a hero. I see him as a man trying to make sense of a world he doesn't quite fit into.


시즌 9의 마지막 에피소드 제목은 Exeunt, 퇴장이다. 모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써스데이 경감은 마지막 인사에서 그를 처음으로 “Endeavour”라 부르지만, 모스는 언제나처럼 무심하고 차분하게 정정한다. “모스입니다. 그냥 모스예요.”

구부러지지도, 부러지지도 않는 젊은 날의 모스 경사는 배우 션 에반스가 말한 그대로다. 세상에 쉽게 섞이지 못하면서도, 그 세계를 이해하려 애썼던 한 사람.


한참 전, 케이블 채널에서 <모스 경감>을 방영한 적이 있다. 곱슬머리의 은발 중년 남성이 매킨토시풍 트렌치를 입고, 담배를 문 채 세상이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부하직원과 탐문수사를 다니던 장면이 기억난다.

무릎 위까지 오는 트렌치는 콜롬보도 자주 입었다. 그러고 보니 콜롬보도 담배를 물었던 것 같다. 두 인물의 차이는 유쾌함의 정도에 있다. 콜롬보는 늘 유쾌하다. 피터 포크라는 배우의 영향도 있겠지만, 캐릭터 자체가 웃음을 내장한 인물이다. 반면 모스 경감은 콜롬보의 30% 정도만 유쾌하다. 냉소적 유머에 가깝다. 그래서 오히려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독신남 모스 경감이 왜 독신남으로 늙었는지는 <Endeavou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첫눈에 반했지만 끝내 고백하지 못한 사랑, 동료 형사 짐과 결혼하게 된 써스데이 경감의 딸 조안을 놓치고 그는 혼자의 삶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숀 에반스는 인데버 역에 굉장히 잘 어울렸다. 겉보기엔 나약해 보이지만 속은 꽉 차서, 누구 하나 들어올 틈도 보여주지 않지만, 그 와중에도 실버라이닝 같은 틈을 두어 가끔씩 그 속을 보이기도 하는 사람.


그래도 모스 경감은 성공했다. 적응을 못해서 맨날 경찰서장한테 미움이나 사고 칼 맞고 다니고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도 못한 채 그러고 살길래 저런…했지만 그래도 형사 경력 잘 쌓아서 경감도 되고 공무원 연금도 받고, 독신이라 어디 돈 들어갈 데도 없고...... 성공한 독신남이다.


+ 나는 형사물을 좋아한다.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도 흥미롭고, 잡아내는 순간도 신난다. 특히 영국식 형사 드라마는 추리의 과정에서 오는 희열이 있다. 미국 드라마처럼 총을 들고 뛰어다니지 않아도, 약간의 냉소, 위트, 어리숙함을 섞어가며 단서를 따라가는 전개가 매력적이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결국 치밀하게 맞물리는 수사 과정이 그렇다.

영국 형사 드라마의 또 다른 강점은 인간 심리의 세밀한 묘사다. 치정, 질투, 충동, 긴 시간을 들인 복수의 시나리오, 심지어 사이코패스의 심리까지. 인간의 감정, 혹은 감정의 부재를 심도있게 다루며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잔인함을 묘사하는 방식에 위트가 깃들어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난 역시 완성된 콘텐츠를 보는 걸 좋아한다. 유튜브를 안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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