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계절이 있나요?

아니요

by 마나스타나스

장르로서의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영화는 어떤 계절과 가장 잘 어울릴까.


<러브 액추얼리>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같은 로맨스의 고전들은 겨울에 어울린다는 인식이 있다. 나 역시 이 영화들을 다시 찾게 된다면, 아마 겨울일 것이다. 따뜻하고 무해하며, 결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정함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겨울밤, 담요를 둘러쓰고 군고구마를 까먹으며 안락하게 보는 그 맛이 분명 있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한 영화는 언제 보는 게 가장 좋을까.


최근 두 편의 영화와 한 편의 일본 드라마를 보고 나서 떠오른 생각이다.


우디 앨런 + 소피아 코폴라 = 셀린 송


<Past Lives (인연)> 이란 영화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셀린 송의 영화는 보고 나면 그 여운이 꽤 깊은 흔적으로 남는다. 뭐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셀린 송의 영화는 우디 앨런처럼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처럼 약간 비뚤지도, 약간 미쳐 있지도 않다.

또한 셀린 송의 화법은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처럼 가을날 바래 떨어지는 낙엽의 쓸쓸함을 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속에는 겨울밤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군고구마를 먹을 때 느낄 수 있는 아늑한 기운이 스며 있다.


<머트리얼리스트 Materialist>는 사랑할 만한 가치와 사랑받을 만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가치(Value)와 값어치(Worth), 그 어떤 것도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극 중 루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쉬운 거거든요.” 어느 순간 불쑥 들어와 버리면 그것이 사랑이지만, 데이트는 다르다. 데이트에는 가치와 값어치가 끊임없이 개입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하는 뉴욕의 성공한 매치메이커 루시의 이야기다.


자칭 머트리얼리스트인 루시는 재벌남 해리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에 비해 가치가 떨어져요. 나를 사랑할 가치가 있나요?”
물질주의자다운 대사지만,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정작 제대로 물질주의자인 경우는 드물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선언은 늘 애매하고 불완전한 법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쉽게 규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사실은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고 다닌다.)


루시의 전 남자친구 존은 서른일곱에 케이터링 웨이터로 일하며, 연식도 알기 힘든 오래된 볼보를 몰고 다니면서 연극 오디션을 전전한다. 주차비 25달러 때문에 다투고 헤어진 사이였지만, 루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돈도 없고 직업도 변변찮지만, 나는 존을 사랑한다.” 진짜 물질주의자가 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따르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는 것’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 좋든, 싫든.


모든 여자가 선망할 만한 ‘가치’를 두르고 사는 재벌남 해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어렵다고. 사랑하려고 하면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그야말로 진짜 머트리얼리스트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 - 어 근데 사랑은 돈으로 안 되네.

더 글로리 속 연진의 남편 하도영도 같은 말을 했다. “내가 말했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제라고.” - 근데 그에게도 돈으로 안 되는게 있었다.


영화의 맨 첫 장면과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 성형수술도 몇백억짜리 펜트하우스도 해리 윈스턴의 다이아몬드도 없던 시절, 어떤 연유로 사랑하게 되고 함께 하게 된 태초의 남자와 여자.


Past Lives, 인연


셀린 송은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답게, 동아시아 특유의 정서인 ‘인연’을 테마로 매우 감성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서양인이 이해하려는 방식대로 인연을 ‘논리적 설명’으로 해석하지만, 결국 닿는 지점은 안타깝고 슬프며 어쩔 수 없는 감정의 영역, 곧 ‘인연’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나영, 즉 노라가 2012년 서울에서 해성과 영상통화를 하며 신경질을 내는 장면이었다.
“내 꿈을 위해 뉴욕에 왔는데, 자꾸 서울 가는 비행기표를 검색하고 있는 내가 너무 화가 나.”
원래 안 될 인연이라면, 그렇게 흘러가는 거다.


나영과 해성은 서로에게 묻고 또 미룬다.
“너 언제 서울 와?”
“너는 언제 뉴욕에 올 거야?”
“왜 뉴욕에 오기 싫어?”
“내가 왜 서울에 가야 하는데?”
“상하이 가면 뭐 할 건데?”

원래 안 될 인연은 그런 것 같다, 하고 시니컬하게 넘겨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스무 살 중반을 넘어선 이들의 대화가 남긴 숨은 메시지는, 아마 누구나 한 번쯤 다른 방식으로 경험해 봤을 것이다. 지금의 관계에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이어가거나 발전을 기대하고 싶은 마음. 그렇다고 먼저 다가섰다가 상처받을까 두려운 마음. 그러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채로, ‘인연’은 흘러가 버린다.


그래서 나영, 노라는 어린 시절의 사랑을 다시 만난 해성과 달리, 지금의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남편에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의 사랑은 바로 너라고. 그러나 동시에, 해성을 택시에 태워 공항으로 보내고 돌아서서는 오열할 수밖에 없다. 그것 역시 ‘지나간 인연’이기 때문이다.


두 영화에서 셀린 송이 선택한 음악들과 촬영한 방식은 각 영화의 맥락에 맞게 매우 잘 어울린다.

- 난 무심하게 따뜻한 게 좋은데, 딱 그러하다.


태초의 남자와 여자처럼, 다시 돌아 함께하게 된 루시와 존, 몇 번을 돌았지만 지나가 버린 인연의 나영과 해성. 그래도 따뜻해.


그리고 한 편의 일본 드라마 ― 그 유명한 <롱 베이케이션>


국내 OTT 플랫폼 왓차는 오래된 영화와 드라마를 꽤 많이 보유하고 있다. 추억의 영화, 추억의 드라마들이 즐비하지만 <롱 베이케이션>은 내게 추억의 드라마는 아니다. 그냥 한번 볼까 하고 열었는데, 아, 이래서 전설이라 불리는구나 싶었다.


기무라 타쿠야의 초기작인 <롱 베이케이션>을 보고 있으면, 젊음과 여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24세의 기무라 타쿠야는 그 자체로 젊음이고, 여름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여름의 드라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들어온 건 여자 주인공을 맡은 야마구치 토모코였다. 그녀는 독보적이다. 그 독보적 매력은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그만한 매력을 가진 배우를 찾기 어렵다는 확신을 가능하게 한다.


내가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이유가 있다. 기무라 타쿠야나 타케노우치 유타카의 풋풋하고 설익은 연기, 그리고 야마구치 토모코의 자연스러운 연기(실제로도 비슷했다고 한다) 속에서 반짝이지만 어쩐지 서러운, 젊음의 편린이 무겁지 않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무거우면 질리거든.


또한 이 드라마를 그저 가볍게만 소비되는 ‘트렌디 드라마’라고 보기도 어렵다. 20대를 지나 30대 초반으로 접어든, 여전히 젊지만 동시에 불안한 이들이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또 정착하려 애쓰는 모습이 과하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담겨 있다.


“나는 그저 지금을 긴 휴가라고 생각할 뿐이야.” ― 미나미
“이제 긴 휴가를 마칠 때도 되었지.” ― 세나 “쿤”


"젊은이들, 그건 긴 휴가도 아니여" - 나의 얘기.


+ 드라마의 주제곡인 라라라송은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딱 90년대 바이브인데 2025년에 들어도 촌스럽지가 않다. 아니, 촌스러운 건 분명하지만 그 촌스러움 속에서 발하는 세련됨은 2025년의 음악들은 흉내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영화와 드라마는 어느 계절이 어울리는가로 돌아가면, 내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 것이다.


사랑에 계절이 있을 리 없잖아.

사랑은 그냥 그 시간에 불쑥 찾아올 뿐- 마치 미나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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