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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은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상대의 모든 행동을 알고 싶고, 통제하고 싶다면...

by 누리

우리 집 50m 근처에 일래 형이 산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 형이다. 근데 하는 짓은 한참 어린 동생 같아 많이 놀린다. 이 글에 본인 실명을 쓰는 것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간다. 우린 서른 즈음에 친해졌다. 유독 말이 잘 통해서 내가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이걸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일래 형 입이 깃털처럼 가벼운 걸 알아서다. 비밀을 지켜주기로 하고선 여기저기에 퍼뜨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속 이야기를 덜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끔 만나서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눈다.


일래 형은 일 년 정도 만난 최민이라는 여자친구가 있다. 일래 형은 여자친구 최민을 정말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는 표현보다 ‘과하게 집중한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다들 일래 형을 로맨틱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매일 꽃을 준비하고, 최민이 좋아하는 디저트를 사 가고, 그녀의 SNS 게시물에 1초도 안 돼서 ‘좋아요’를 누르는 모습은 정성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행동은 점점 더 집착으로 변해갔다.


Unsplash의 valeriia-miller


“최민이 오늘 점심에 뭘 먹었을까?”

어느 날, 일래 형이 카페에서 바닐라 라테를 홀짝이며 내게 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자 일래 형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최민이가 SNS에 뭔가를 안 올리네. 음, 이상한데.”

나는 순간 당황했다. 단순히 점심 메뉴를 올리지 않았다고 이상하다고? 하지만 일래 형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시 바쁜 거 아닐까?”

내 말에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보통 이 시간쯤이면 사진을 올리는데… 뭐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처럼 숨이 막혔다. 일래 형은 최민의 하루 일과를 거의 다 외우고 있었고, 그녀의 작은 습관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미용실을 예약하면 미리 날짜를 기억해 두고, 네일아트를 바꾸면 0.1초 만에 알아차렸다. 문제는 이것이 그녀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그의 불안감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점이었다.


하루는 일래 형이 내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최민이 오늘 카톡 답장을 1시간 만에 했어.”

나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일래 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평소엔 10분 안에 답장했거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은 매 시간마다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걸까? 어떻게 매번 10분 안에 답장을 하지? 화장실에 갈 때도 핸드폰을 가지고 가나? 자기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더 놀라운 건, 일래 형이 이를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 ‘무언가 변화가 생긴 신호’라고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최민도 숨이 막혀 답답했던 모양이다. 결국 그녀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어느 주말, 최민이 일래 형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리고 마주 앉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Unsplash의 taylor-hernandez


“오빠, 난 오빠가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는 게 좋아. 근데 가끔은 숨이 막힐 때도 있어.”


일래 형은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하지만 최민의 눈빛을 보고 그는 깨달았다. 집착이 사랑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후 일래 형은 달라졌다. 아니, 노력하기 시작했다. 즉각적인 답장을 기다리지 않기로 하고, 그녀의 SNS를 하루에 한 번만 확인하는 연습을 했다.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도 늘려가면서 그녀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몇 달 후, 일래 형이 내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최민이가 점심 메뉴 안 올려도 괜찮더라.”


나는 놀라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와, 축하해! 드디어 집착을 내려놓은 거야?”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오늘 저녁에 뭘 먹었는지 궁금해졌을 뿐이야.”


나참, 이런 사람도 연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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