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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25. 2018

낡은 카르텔, 초라한 몸부림

우리는 세기의 전환점을 살고 있다

미투(#MeToo)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나는 30년 이상 이 땅에서 성 문제에 대해 별생각 없이 살아온 한국 남자이다. 그리고 최근 그것이, 정확히는 그렇게 별생각 없이 살아도 상처나 불이익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젠더 권력을 독점한 남성들의 특권이었음을 알았다.


성차별,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극도로 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고, 사회적으로도 남자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젠더 기득권을 쥐고서 별생각 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내가 이제 와서 대단한 자각이라도 한 마냥 설칠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일기를 쓸 수 있을 뿐이다. 여성들의 연대와 용기 있는 행동에서 느끼고 배운 바를 담담히 적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각계 저명인사들의 성폭력에 관한 문제라면, 하루 한 명씩 폭로해도 365일이 모자랄 것이다. 저명인사들 뿐이랴. 성폭력은 우리의, 나의 일상에 언제나 녹아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성폭력 문제에 대응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폭력에 적극 가담했다. 다른 누군가는 비겁하게 침묵하고 그 침묵을 합리화했다. 신기하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여성을 비롯한 많은 성소수자들이 폭력에 희생되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젠더 기득권을 소유한 자들이 다 함께 만들어낸 거대한 카르텔이다. 이 명백한 사실 앞에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나는 깨끗했다', '내가 무슨 기득권이냐', '여성들이 침묵하는데 남성들이 어떻게 먼저 나서느냐', '아예 몰랐던 것도 죄가 되느냐'. 남자들도 하고 싶은 말이야 많겠으나 그런 변명이 유효하게 느껴지기에는 그동안 비겁해도 너무 비겁했으며, 무지해도 너무 무지했다. 그것부터 인정해야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아마 인정하고 나면 다른 말들은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부끄러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동안 그래도 되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폭로되는 수많은 진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모든 성폭력은 수직적 권력관계에서 비롯된다는데, 그동안 우리 사회의 남성들은 여성들이 권력의 상층부에 진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만약 여성들이 고위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 더 이상 그들을 착취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일을 못한다', '이기적이다', '단체 생활을 모른다', '너무 감정적이다'라는 식의 말을 숱하게 들어야 했다. 성인 여성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심하다', '예민하다', '잘 삐진다', '의존적이다' 하는 말들은 희한하게 여자아이들만을 표적으로 삼아 날아가는 화살 같았다. 물론 남자아이들도 그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이 이기적인 것은 으레 그런 것이었고 자꾸 싸우려 드는 것은 승부욕이 강해 그렇다는 식으로 곧잘 포장되던 것에 비하면 이는 분명 공정하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여성들을 일정한 프레임으로 특징지었고, 거기에 일부러 흠집을 냈다. 그리고 이 모든 부당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남성 사회에 편입되려 부단히 노력하는 여성들만이 비로소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영원할 것 같던 이 견고한 카르텔이 점점 부서지고 있다. 여성 혐오를 디폴트로 깔고 가던 시스템은 우리 사회를 야금야금 좀먹었고,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병을 앓게 만들었다. 군데군데 썩지 않은 곳이 없고,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그 괴물 같은 몸 덩어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많은 남성들이 그동안 안주해온 이 괴물의 품 안에서 떠나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있지만, 세계는 이미 달라졌다. 이 문제를 외면하거나 우회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미투 운동의 본질이라 믿는다. 페미니즘은 앞으로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선도할 것이 분명하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


미투는 진행 중이다. 남성들은 그동안 보지 못했거나, 비겁하게 외면했거나, 일부러 덮어두려 했던 자신의 추악함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각계 저명인사들 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음지에서 은밀히 자행되던 모든 성폭력이 낱낱이 드러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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