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속에서 '색채가 없다'는 말은 다분히 중의적이다. 피상적 층위에서 그것은 쓰쿠루의 이름에 색채를 의미하는 한자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나고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사귀었던 절친한 친구 넷은 모두 이름에 한 글자씩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은 모두 이름 속 색채로 불리게 되었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그동안 쓰쿠루만 계속 '쓰쿠루'였다. 쓰쿠루의 이름에는 색채(글자)가 없다.
쓰쿠루는 자신을 특징이 없다고 느낀다. 그가 생각하기에, 네 명의 친구들은 이름만큼 뚜렷한 개성을 지녔지만 쓰쿠루만은 그렇지 않다. 쓰쿠루는 딱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아카는 전과목 톱일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며(아오는 럭비부 주장을 맡을 정도로 탁월한 선수였다), 돋보이는 외모(시로는 일본 인형이나 모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나 매력적인 성격(구로는 시니컬하면서도 애교 넘치는 생기와 유머감각을 지녔다)을 지니지도 못했다. 그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오직 쓰쿠루만이 '색채(특징 또는 개성)가 희박했다'.
한편 쓰쿠루가 고등학생 시절에 만난 네 명의 친구들은 단순히 친구 이상의 어떤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완벽한 조합이었다. 30대 중반을 사는 현재의 쓰쿠루는 그 이후로 한 번도 그때와 같은 완벽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믿는다. 그만큼 그들과의 관계는 빈틈없이 들어맞았고, 어떤 불만도 없었다. 쓰쿠루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였다. 공동체의 목적은 '그렇게 존재하고 존속되는 것' 그 자체였다. 돌아갈 곳이 있냐는 연인의 질문에 쓰쿠루는 '이제' 그런 곳은 없다고 답한다. 학창 시절에 경험한 농도 짙은 관계가 이후 맺을 관계들의 색채를 앗아가 버린 것이다. 쓰쿠루는 성인이 되어 맺은 관계들에서 어떤 색채(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관계의 완벽함에서 온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쓰쿠루는 그토록 완전하다 믿었던 관계에서 버림받았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여느 때처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도쿄에서 나고야로 돌아온 쓰쿠루에게 아오는 앞으로 우리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통보한다. 쓰쿠루는 모두의 뜻이냐고 되묻고, 아오는 그렇다고 답한다. 그밖에 다른 설명은 없다. 쓰쿠루는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16년이 흐른다. 그동안 쓰쿠루는 사회적 관계에서 일종의 불구가 되고 만다.
20살 무렵에 일방적인 거부와 부정을 경험한 쓰쿠루는 그로부터 몇 달간 죽음에 천착한다. 1년쯤 후에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하이다를 만나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교류하지만 이전 친구들만큼은 아니다. 하이다는 쓰쿠루에게 피아노 곡 레코드를 남기고 떠나는데, 이것이 소설 속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으로 쓰이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이다. 그중 쓰쿠루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곡은 학창 시절 시로가 즐겨 연주하던 「르 말 뒤 페이Le Mal du Pays」. 프랑스어로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을 의미한다.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율에 깃든 슬픔은, 모든 것이 갖춰졌던 평온한 관계에서 이유도 모른 채로 배척당한 쓰쿠루가 느끼는 슬픔에 겹치며 특유의 색채를 얻는다. 쓰쿠루는 하이다가 일부러 남겨두고 떠난 레코드를 듣고 또 들으며 하이다를 떠올리고, 시로를 추억한다.
그렇게 그럭저럭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현재의 쓰쿠루에게 친구들을 만나보라고 설득한 사람은 그의 연인 기모토 사라이다. 사라는 여행사의 유능한 패키지여행 기획담당자이다. 쓰쿠루의 과거에 깊은 흥미를 가진 사라는 특유의 정보수집능력을 발휘해 네 사람의 대략적인 근황과 주소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다. 쓰쿠루는 사라의 도움과 격려에 힘입어 16년 전 자신을 버린 친구들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순례는 본래, 성지를 찾아다니는 행위를 뜻한다. 쓰쿠루의 성지는 삶을 통째로 집어삼킨 학창 시절의 관계와 배신, 그리고 그것들을 쓰쿠루의 인생에 깊이 심어놓은 친구들이다. 그들은 쓰쿠루를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한 사람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쓰쿠루 개인에게는 가히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결국 쓰쿠루는 친구들을 찾아 자기만의 성지순례를 떠난다. 그리고 그 순례에서 진실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겹겹이 포개어 놓은 색채의 의미를 통해 그의 인생을 부감적으로 조망한다. 다시 말해 다자키 쓰쿠루의 인생은 조금도 입체적이지 않다. 종이 위에 붓으로 칠한 색채가 아무리 겹겹이 쌓여도 결국 평면에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을 높은 하늘에서 무심히 내려다보듯 밋밋하게 그려낸 것은, 다른 무엇보다 쓰쿠루 본인이 자신의 삶을 지독히도 평면적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쓰쿠루의 인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쓰쿠루는 스스로 어느 하나 내세울 것도, 자랑거리도 없는 사람이라 여겼고, 그룹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텅 빈 그릇이라 생각했지만 친구들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다. 쓰쿠루는 그들 관계에 안정감을 부여하는 존재였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룹에서 잘라버려도 결국 버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강인한 사람이었다. 채색되지 않았다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듯,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도 누군가에게는 꾸준히 하나의 이미지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가 '무의미하다'라고 말하는 것에도 모종의 의미가 스며들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의미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관계 속에서 규정되며 비로소 고유의 색채를 얻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