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가족>은 우리가 가족이라 일컫는 개념들의 덩어리를 잘게 파편화한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말 그대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럼에도 '가족'이란 개념을 빼놓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공동체를 만난다.
영화는 낮은 재즈의 선율과 함께 리드미컬하게 등장하는 한 아이와 중년 남성의 콤비로 시작한다. 아빠와 아들로 보이는 둘은 생필품을 훔치러 마트에 왔다. 아들 쇼타(죠 카이리)와 아버지 오사무(릴리 프랭키)는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다가 작업에 들어간다. 절묘한 팀플레이로 일용할 양식들을 거두어들인 쇼타와 오사무는, 고로케를 사들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린(사사키 미유)을 만나 데려온다. 린은 그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아이는 집 문 밖에 버려진 듯 쪼그려 앉아있었다.
아들 쇼타와 아버지 오사무.(출처 : 영화 <어느 가족>)
집에는 그들이 훔쳐온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 중년 여성 노부요(안도 사쿠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키(마츠오카 마유). 훔쳐온 음식들만 아니라면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떠드는 모습은 영락없이 어느 단란한 가정의 평범한 저녁식사 풍경이다. 하지만 이들 가족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평범한 가족이라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도둑질을 전수하고, 그렇게 훔쳐온 음식을 온 가족이 즐겁게 나누어먹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더 기이한 건, 불행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이들 가족에게도 나름대로 행복의 방정식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영화 중반 하츠에의 사망 직전까지 관객들은 이들 가족에게서 어떤 불행도 발견하기 어렵다. 이들은 시종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며, 그러면서도 구속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의존하지도 않는다. 영화에 깊이 빠져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 공동체가 어쩌면 현대 가족의 이상적인 관계도를 구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시에 빠질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모순 덩어리인 가족을 이토록 세밀히 묘사하면서도 형식 면에서는 현대 사회의 대가족을 그대로 차용했다는 점이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큰딸, 작은아들, 막내딸(물론 영화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역할이 이런 식으로 명시되지 않지만 적어도 '형식 면에서'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이 한 가족을 이루며 만드는 균형감은 이 가족이 가진 태생적 이물감을 상당 부분 희석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가장 익숙한 형식 안에서 그들 가족이 주고받는 정서에 편안히 끌려들어 갈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감독은 어느 가족의 내부에 깊숙이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유인으로서, 겉으로 가장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한 형식을 선택하여 펼쳐 보인 것이다. 결과는, 알다시피 성공적이다.
이들이 함께 사는 좁은 집의 툇마루에서 함께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장면은 그런 이상적 가족의 모습을 한껏 강조한다. 영화는 이들 가족의 모습을 부감 쇼트로 잡으면서 약간은 황홀한 장면을 연출한다. 가족은 다 함께 불꽃놀이를 보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집에서는 각도상 불꽃놀이를 볼 수 없다.(사실 그들은 머리 위의 카메라 렌즈를 쳐다볼 뿐이고 오히려 관객들이 조명에 비친 그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셈인데, 나는 여기에서 불꽃놀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보았다. 즉 제멋대로 튀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일종의 불꽃놀이를 본 것은 그들 가족이 아니라 우리 관객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이 장면을 조금 황홀하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누군가 이를 지적하자 오사무는 '보이진 않지만 소리는 들린다'며 너스레를 떤다. 나에겐 이것이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라는 말로 들렸다. 어차피 보이지 않을 불꽃놀이를 보는 척하기 위해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하늘을 바라보는 이들 여섯 사람을 지켜보면서, 관객들은 자연스레 우리네 평범한 가족들을 떠올리게 된다. 무조건적이고, 언제나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세상 어떤 사랑보다 고결해야 하는 가족애를 기반으로 굴러가는 평범한 가족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영화 속 가족은 분명 일탈적이다. 그런데도 이 장면에서 언뜻, 그들이 우리보다 행복해 보였던 이유는 뭐였을까. 역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느 가족.(출처 : 영화 <어느 가족>)
이처럼 서로 기댈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이 온전히 자유롭던 가족에게도 위기는 찾아온다. 바로 할머니 하츠에의 사망이다. 하츠에는 고령으로 자연사한 듯하다. 불법적으로 생계를 이어오던 가족은 할머니의 사망을 신고하고 장례를 치를 최소한의 법적 자격마저도 없다. 결국 노부요와 오사무는 하츠에를 집 안에 묻는다. 한편 여동생 린이 그간 배운 기술로 도둑질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쇼타는 스스로 경찰에 붙잡힌다. 이번에도 쇼타의 법적 보호자는 가족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쇼타를 병원에 버려둔 채 짐을 꾸려 도주하려다 집 앞에서 체포당한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영화는 완전히 다른 장르로 변한다. 이전까지는 다분히 가족 코미디 장르로 흘러감으로써 낯설면서도 친근한 가족의 이미지를 어필했다면, 하츠에가 죽고 쇼타가 붙잡혀 가족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는 일종의 스릴러로 탈바꿈한다.
이때까지 우리에게 많은 웃음을 주며 충분히 친숙해졌던(혹은 그렇다고 믿었던) 이들 가족의 이미지는 영화 속 수사관들에 의해 섬찟한 범죄조직의 광기로 말끔히 포장된다. 물론 그것은 영화를 보기 전 우리 모두가 갖고 있던 프레임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가 아닌 뉴스를 통해 현실에서 이 가족의 이야기를 접했다면, 우린 지금처럼 그들을 연민할 수 있었을까. 어느 괴기스러운 종교 단체의 집단적 망상에 의한 해프닝으로 간주하지 않았을까. 현대의 가족을 규정하는 꼼꼼한 법리 앞에서 그들의 인간적 부대낌과 서로를 구속하지 않던 합리적 거리감은 모두 어느 기이한 가족의 엽기적 행각에 지나지 않게 된다. 느슨했던 가족은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그들 내부로부터 은밀히 그 모든 과정을 목격한 관객들은 자문한다. 가족이란 대체 뭘까.
영화는 린이 원래 가족으로 돌아간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린은 쇼타와 오사무에게 배운땅따먹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린은 자신을 낳은 부모에게 돌아갔지만, 한 때 머물렀던 어느 가족의 흔적은 쉬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흔적은 린의 무의식에 각인처럼 남았다.
한편 전통적 가족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이상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이던 가족의 모습은 뿔뿔이 흩어진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을까. 아마 '그렇다'고 답해야 할 것 같다. 영화의 말미, 정말 나를 버리고 떠나려 했냐는 쇼타의 물음에 오사무는 짧게 '응'이라 답하고, 미안하다는 오사무의 말에 쇼타도 짧게 '응'하고 답한다. 처음부터 각자의 영역에서 필요한 만큼만 관계를 맺어왔기에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숨길 이유도, 누군가를 길게 탓하고 원망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기이한 사건에도, 가족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물음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오사무와 마지막 밤을 보내며 모든 것을 확인한 다음 날, 버스를 타고 떠나는 쇼타는 뒤따라오던 오사무가 충분히 멀어지자 그제야 뒤돌아보며 입모양으로만 (아빠..)를 부른다. 이전까지는 그래 본 적이 없다. 쇼타에게 아빠는 그런 것이었다. 이 영화가 어느 가족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정서는 이 마지막 쇼타의 말과 정확히 겹친다. 무리하게 요구할 것도, 억지로 숨길 것도 없는 어느 가족. 사망신고도, 장례절차도 없이 살던 집 한편에 묻혀야 했던 할머니가 임종 직전에 놀러 간 바닷가에서 역시 입모양으로만 낮게 읊조렸던, (정말 고마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