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서사에 지워진 인간의 삶

클린트 이스트우드, <아버지의 깃발>, 2006

by 달리

* 스포일러 : 강함.



영화 <아버지의 깃발Flags Of Our Fathers>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 열도 남쪽의 작은 섬 이오지마에 상륙하여 작전을 벌인 미군의 이야기를 메인 에피소드로 다룬다. 많은 희생자를 내며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군은 수리바치 산을 점령한 뒤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다. 관례에 따른 상징적 행위일 뿐이었지만, 당시 이 모습을 찍은 사진은 미 전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점령지에 성조기를 꽂는 미군들의 모습. 스틸컷(위)과 실제 사진(아래).(출처 : 영화 <아버지의 깃발>)


사진을 보면 당시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구도와 배경, 기울어진 깃발과 이를 세우려 안간힘을 쓰는 여섯 군인들의 모습. 훌륭한 선동가의 백 마디 연설보다 훨씬 더 강한 흡인력을 가진 서사가 이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1945년의 미국인들은 이 사진에서 분투와 희망, 거룩한 승리와 숭고한 전우애를 보았다. 얼마 뒤 사진 속 주인공이자 생존자였던 닥(라이언 필립), 개그논(제시 브래포드), 아이라(애덤 비치)는 정부의 명령에 의해 본국으로 소환된다.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사지에서 돌아온 이들 세 명의 군인이 해야 하는 일은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한 캠페인 활동이다. 당시 최소 140억 달러의 전쟁 기금을 마련해야 했던 미 정부에게, 사진 속 주인공들이 지닌 서사적 가치는 결코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결국 닥과 개그논, 아이라는 정부가 기획한 각종 행사에 동원되어 캠페인의 주역이자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평범한 군인이었던 닥, 개그논, 아이라는 정부의 기획에 의해 전쟁 영웅으로 거듭난다.(출처 : 영화 <아버지의 깃발>)


영화는 미 본토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세 군인의 일상이 과거 이오지마 섬에서 겪은 처절하고 잔혹한 경험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전쟁 기금을 마련하는 일도 물론 전쟁만큼 중요하지만, 삶과 죽음이 혼잡하게 뒤섞인 전장에서 마주했던 생생한 경험과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세 인물은 언론에 의해 전쟁 영웅으로 찬사 받으면서도 끔찍했던 이오지마의 기억을 끝내 놓지 못한다. 영화는 이들에게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전장의 조명탄으로, 관중의 환호를 전우의 절박한 외침으로 오버랩시키며 인물의 내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셋은 매일같이 덮쳐오는 전장의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시달린다.


여기에 더해 그들을 괴롭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그들이 깃발을 꽂은 과정은 실제론 사진처럼 거룩하지 않았다. 산 정상의 성조기는 한 번 바꾸어 달렸는데, 이오지마를 찾은 미국 고위 관료가 처음 꽂은 성조기를 기념으로 가져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전쟁에 기여한 바도 없이 깃발을 탐내는 관료를 못마땅하게 여긴 군 지휘관은, 깃발을 바꾸어 관료를 속이기로 했다. 사진은 그렇게 깃발을 바꾸어 매는 도중에 찍힌 것이었다. 실제 전쟁은 대중이 품은 낭만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영화 속에서 죽은 전우를 보며 힘없이 내뱉는 어느 군인의 말처럼 전쟁은 '개죽음'일 뿐이었다.


(전쟁은 결코 낭만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묘사한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이오지마로 향하던 군함에서 해병대원 한 명이 바다에 빠지지만, 함대는 아무 일 없는 듯 계속 전진한다. 당연히 구출될 줄 알고 물에 빠진 전우를 마음껏 조롱하던 동료 해병대원들은 망연해진다. 닥은 말한다. "전우는 절대 버리지 않는다더니..."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쟁의 낭만은 그저 또 하나의 야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깃발 사진에 얽힌 이런 후줄근한 사연은 당시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어서는 안 되었으므로, 미 정부는 이 사실을 숨겼다. 사진이 처음부터 연출되었다는 의혹도 일었지만 닥과 개그논, 아이라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실제 사진의 연출 여부는 현장에 있었던 이들만이 알겠지만 이 시점에 중요한 사안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웅 서사에 지워진 한 인간의 삶에 관한 물음일 것이다. 엉터리 깃발 사진으로 상징되는 전장의 참혹한 진실을 차마 알릴 수 없었던 영웅들은, 영웅 노릇이 끝난 뒤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닥과 개그논, 아이라가 정부와 언론에 의해 영웅으로 포장된 것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소환되었고, 그 필요가 다하자 외면받았다. 박제된 유물처럼 가끔 구경온 사람에게 사진 몇 장 찍히는 것 외에는 딱히 주목받을 일도 없었다. 아니, 주목받을 이유는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우연히 찍힌 사진 한 장으로 영웅이 되었다가 허무하게 지워진 이들은 그저 평범한 군인이자, 인간일 뿐이었다. 닥의 아들 제임스(토마스 맥카시)가 아버지의 깃발에 얽힌 사연을 조사하다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영웅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점뿐이다. 엔딩을 장식하는 제임스의 독백은 영화 <아버지의 깃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간결하면서도 진솔하게 표현한다. "진정으로 이들을 기리고자 한다면, 이들의 참모습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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