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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Nov 27. 2018

기억 하나. 스트레스

나를 괴롭히던 방 안의 코끼리

아주 어릴 적 나는 주기적으로 '방 안의 코끼리'를 상상하며 격하게 몸을 떨었다. 좁은 방 안에 꽉 들어찬 코끼리가 불쑥 떠오를 때마다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답답해졌고, 방 한 구석에 주저앉아 수십 분간 경련에 시달렸다. 부모님은 증상의 원인을 알 수 없어 안절부절못했다. 나를 둘러싸고 앉아 등을 토닥여주고, 손을 주물러주고, 마실 물을 떠다 주었다. 지금은 이미지 형태로 희미하게 남아있는 감각이지만, 그때의 나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왔을까. 설명하기도 힘든 이런 고통을 왜 내가 겪어야 할까.


나중에 '방 안의 코끼리'가 일종의 관용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기하긴 했지만 내가 경험한 코끼리와는 성격이 한참 달랐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무시 못할 만큼 커다란 문제가 존재하지만 그 여파가 두려워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진땀만 흘리고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와는 별 관계없는 말이었다.


다행히 학교에 입학하면서 증상은 잦아들었지만, 내가 그런 극심한 스트레스에 주기적으로 시달렸었다는 기억은 지금까지도 뚜렷이 남아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제목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 출간되고 사회에 널리 알려지던 시절에, 나는 엉뚱하게도 어릴 적 방 안에 구겨져 있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혹시 이 책을 쓴 사람도 나처럼 방 안의 코끼리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나. 그처럼 에 사는 사람이 나와 같은 문제를 겪고, 또 책으로 펴내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아니었다. 책은 현실정치에서 이슈 프레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것이 유권자들의 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분석을 담고 있었다. 헛다리도 이런 헛다리가 없었다.


이제 나는 어릴 적에 겪었던 것과 같은 불안이나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다. 대신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에 묶여있다. 나는 이 스트레스가 일상의 패턴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적당한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삶의 리듬. 이것도 언젠가는 끝나겠지. 갖은 스트레스로 버무려진 하루를 버텨내는 방법은 때로 이렇게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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