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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Dec 27. 2018

기억 아홉. 선생님

그 날 그 교실의 추억

군 복무를 마친 뒤 교직에 복직하고 나서 한동안 아이들에게 내 별명은 홍당무 선생님이었다. 자주 빨개지는 얼굴 때문이었다. 아이들 행동에 웃다가 빨개지고, 혼내다 빨개지고, 음악 시간에 노래를 불러주다 빨개지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다 민망해서 빨개지고. 하여튼 내가 생각해도 참 희한하다 싶을 만큼 얼굴 달아오를 일이 많았다. 아이들은 재미있어했다. 내 얼굴이 빨개질 때마다 홍당무 선생님이 또 나타났다며 흥분해서 몸을 들썩였다. 당황한 나를 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마주 바라보다가 고등학생 시절의 어느 날 교실 속 풍경을 떠올렸다.


고2 때 일이다. 나는 고등학교 1, 2학년 때 연속으로 같은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학생들에게 무섭기로 1, 2위를 다투던 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학창 시절을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분이지만, 숨 막히던 고1을 보내고 이제 겨우 숨 좀 쉬어보나 기대할 무렵에 또다시 선생님을 만나게 된 건 분명 재앙이었다. 살살 약을 올려대는 친구들이 진심으로 미워질 정도였다.


내가 홍당무 선생님이란 별명을 얻은 시기에 고1-2학년 담임선생님이 떠오른 건 무리가 아니었다. 왠지 어울리지 않지만 그 시절 선생님도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전공은 지리였는데, 본인 입으로 강남 학원 강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 말하실 만큼 수업이 알찼다. 선생님을 무서워하는 친구들도 그것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 현안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시각으로 유익한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기 때문에 선생님에겐 함부로 대들 수 없는 어떤 지적, 윤리적 권위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 선생님이 어느 날 이런 얘길 했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 양반이 아주 대단한 양반이야. 이 사람이 죽을 때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을 텐데도 '악법도 법이다'하면서 사약을 먹고 확 죽어버렸다 이거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선생님, 그거 소크라테슨데요."

"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가차 없이 선생님의 말을 끊은 친구는 평소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하던 여자아이였다. 그런 친구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구하지도 않고 곧장 치고 들어간 것이다. 몇 초가 흐르는 동안 반 친구들 모두 속으로 상황 파악을 완료했다. '선생님이 틀렸고, 친구가 옳다.'(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란 말을 했다는  실은 와전된 얘기지만 이 글에선 중요하지 않다) 여기저기서 깨달음의 탄식이 신음처럼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선생님의 고개가 툭 떨어지더니, 납덩이처럼 무거운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왠지 모를 민망함에 내 고개도 같이 숙여지다가 슬쩍 보니 채도 100퍼센트의 선명한 붉은색이 선생님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곧이어 선생님이 창가로 느릿느릿 걸어가시더니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입에선 "하..." 하는 소리와 함께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고,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서로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참느라 진을 빼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 속에 섞여 배를 잡고 웃느라 정신없었다. 이게 뭐라고 그 날 그 표정들과 교실 분위기, 선생님의 허탈한 웃음과 친구들의 가린 입 사이로 삐져나오던 웃음들까지 생생히 기억나는지. 18살의 나에겐 그게 15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만큼 짜릿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빨개진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그렇게 즐거웠던 걸까. 그런 거라면 가끔은 빨개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는 그게 더 오래가는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평소 합리적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자주 내비치셨던 선생님이 그날 하려던 얘기는 아마, 윤리적 개인이 비윤리적인 과 제도에 희생됨으로써 존속하는 사회 질서의 효용에 관한 의문이었을 텐데, 평소처럼 근엄하게 말했다면 지금 내 머릿속에 그런 개념이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학창 시절의 추억이나 배움은 그런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 속에서 더 강하게 각인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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