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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Dec 26. 2018

기억 여덟. 영어공부

나의 영어 인생 스토리

영어공부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가 영어 발음기호 읽는 법을 알려주신 후로 동안 영어사전 속 단어들을 찾아서 그 소리를 한글로 수첩에 옮겨적곤 했다. 앎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은 꽤나 짜릿했다. 뜻은 모르지만 적어도 읽을 수는 있게 되었다는 기쁨은 곧 영어 학습의 절반을 이루어냈다는 성취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모든 영어 문장 옆에 발음기호가 적혀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사전 속 영단어만 주구장창 읽어댔고 이내 싫증이 나서 그만두었다.


6학년 때는 형과 함께 몇 달간 안양에 있던 E영어학원에 다녔다. 초보 회화반에서 두 번 월반을 했다. 몇 달이 지나 영어로 연극을 할 때는 파트너 대사까지 다 외워서 공연 때 알려주면서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학원 체질이 아니었다. 갈 때마다 긴장이 됐고, 재미도 없었다. 6학년 때 이사를 가면서 영어학원을 끊게 된 건(어쩌면 형과 내가 학원 가길 너무 싫어해서 끊었을 수도 있다) 당시의 나에겐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턴 매주 간단한 영단어로 쪽지시험을 봤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시시한 수준이었다. 정규 영어 시간에 배우는 내용도 전부 학원에서 미리 배운 것들뿐이었다. 나는 자만했고, 내가 정말 영어를 잘한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영어가 싫었다. 온갖 품사와 문장 성분, 절과 구, 시제와 구문들이 나를 괴롭혔다. 미국 사람들은 언어를 왜 이렇게 복잡하게 쓸까 싶었다. 그러다 고1 때 미국에서 수십 년 사신 고모가 딸과 함께 한국에 오셨다. 고모는 영어공부하다 잘 모르겠는 것 있으면 가져와보라고 다. 너무 어려운 문제를 가져가서 고모가 쩔쩔매면 서로 민망해질까 봐 그냥 눈에 보이는 쉬운 단어 하나를 골라 물어보았다. 그 단어가 'theory'였다. 고모는 한 번 쓱 보더니 모르겠다고 하셨다. 눈앞에서 딸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고모가 웬만한 중학생도 다 아는 단어를 모르는 게 이상했다. 물론 딸(내겐 사촌누나, 당시 한국어는 간단한 인사 정도밖에 못했다)은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 아마 성인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에게 필요한 어휘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겼던 거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쓸데없는 영어공부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단 생각만 들었다.


대학에선 영어와 담을 쌓고 지내다가 4학년 때 임용시험 3차에 영어면접이 추가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2차까지 합격한 다음 친했던 형들과 급하게 영어면접 대비 스터디 그룹을 꾸렸다. 이제와 영어공부를 해보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어떤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쓸 수 있는 말 몇 마디를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역시 "I'll do my best"만 한 게 없었다. 거기에 별 필요도 없는 부사구 몇 개와 면접관들이 궁금해하지도 않을 뻔하고 긍정적인 자기소개 멘트까지 몇 개 붙였더니 꽤나 쓸만한 말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다 똑같은 말을 가지고 돌아가며 서로를 면접관 삼아 연습했다. 진정성 어린 눈빛까지 코치해가며. 이런 과정을 거친 끝에 나는 당일 영어 면접 점수 최하점을 받았다.


요즘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영어공부를 한다. 몇 년 전 태국 여행에서 현지인 가이드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고생하던 나를 어느 중국인 여행객이 따라다니면서 도와주었었다.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고마움의 크기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과장되게 해주고 싶었는데 짧은 영어와 부족한 숫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한번 제대로 영어공부를 해보리라 굳게 다짐했다.


이후 꾸준히 노력한 끝에 영어권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기에 부족함 없는 영어실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쓰고 싶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당시 여자 친구이던 아내와 함께 어학원을 다니고(어학원이 폐업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다), 팟캐스트 영어방송을 들으며 따라 해 보고, 친구와 이태원에 가서 새벽까지 외국인과 맥주를 마시며 대화해보고, 몇 년 전에 샀던 영어교재를 다시 꺼내보고, 요즘엔 영어학습 게임까지 하면서 나름대로 여러 방법으로 공부하고 있지만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언젠가 영어를 술술 내뱉는 날이 내게도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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