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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Dec 19. 2018

기억 일곱. 과학상상화

탁월함의 기준

그림엔 흥미도 소질도 없는 내가 살면서 딱 한 번 그림으로 상을 받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과학탐구대회 때 그린 과학상상화. 초등학교 때뿐만 아니라 내 학창 시절을 통틀어 그린 것 중 기억나는 그림은 오로지 이것 하나뿐이다. 나는 그날 우주도시를 그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과학상상화 주제라는 게 미래사회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려내는 그림들은 어딘가 다 비슷비슷했다. 단골 소재는 우주와 해저도시. 사람들이 캡슐 안에서 생활하고, 그 사이로 연결된 몇 개의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식이었다.


고도로 진화한 형태의 과학상상화. 물론 내가 그린 건 아니다.


내 그림도 똑같았다. 어설프게 색칠된 까만색 우주를 배경으로, 두둥실 떠오른 캡슐 속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보고 그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예시로 알려줬을 수도 있고, 먼저 그린 친구들 스케치를 보고 따라 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 흔하디 흔한 과학상상화가 정말 과학적 상상력이 뛰어나서 상을 받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마 색칠을 꼼꼼히 한 것이 승부처에서 주효하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생각해보면 학교란 공간 자체가 본질적인 탁월함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과학탐구대회의 타이틀과 취지를 제대로 살리려면 아이들의 그림 속에서 과학적 상상력과 그를 뒷받침하는 논리의 탄탄함을 보아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학교 교사들은 그림 실력을 주로 본다. 그도 아니면 빈틈없이 채색하는 성실함을 본다. 나는 그게 일종의 편의주의라 확신한다.


물론 초등학교 1학년에게 정교한 과학적 상상력과 논리를 요구하는 건 가혹한 처사겠지만, 학년이 올라가도 아이들의 상상력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그림 실력뿐. 상 받는 아이들의 그림을 살펴보면, 학년이 높든 낮든 자기만의 고유한 아이디어를 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무리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담아도 그림이 별로면 수상작으로 뽑힐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잘 그릴 수 있는 익숙한(그려본) 그림을 그린다.


과학탐구대회만 그런 게 아니다. 시기별로 열리는 계기교육 글쓰기 대회나 표어, 포스터 그리기 대회도 다 마찬가지다. 한글날 기념 글쓰기 대회 원고를 보면 대부분 첫 문단에는 '요즘 청소년들의 언어 사용실태가 심각하다'는 내용이 들어있고, 끝 문단에는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알고 지켜나가자'는 내용이 들어있다. 불조심 표어, 포스터 그리기 대회 수상작의 테마는 대부분 '방심은 금물'이다. 요컨대 누군가 의도한 게 아님에도 거의 공식 수준의 수상 레퍼토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 무슨 대단한 비리가 엮여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학교가 추구하는 탁월함의 기준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는 전혀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는 것. 중요한 것은 겉보기와 완성도다. 다시 말해 '눈치'와 '성실함', 알다시피 20세기 회사원에게 주로 요구되던 덕목들이다. 학교는 이런 것들에 탁월함의 기준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학교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미덕이라는 건 그저 정해진 규격에 순응하는 삶의 자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탁월함은 그 단단한 규격의 윤곽을 깨뜨리는 시도들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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