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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ug 20. 2019

여행기 4

발리의 낭만

2주 동안 인도네시아 발리에 다녀왔어. 개인적으로 아주 많이 기대한 여행이었고,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던 여행지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건 이 이 갖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도 관련되어 있어요. 리의 몇몇 지역은 관광 수익 비중이 어마어마할 텐데도 도로와 대중교통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차와 사람과 오토바이가 좁은 도로 위에서 어지럽게 교차하죠. (우리나라였다면 관광으로 먹고사는 도시절대 이대로 놔두지 못했을 겁니다.) 근데 그게 또 이 감을 낭만적으로 만들어니 신기한 거예요. 말끔히 정리된 도로교통 시스템이 지배하는 발리는 잘 상상이 안 되고, 딱히 매력적일 것 같지도 않아요.


발리의 유명한 관광지에서 교통체증은 일상인데, 이게 꽤 심각한 수준입니다. 빨리 가려고 택시를 잡아  10km쯤 되는 목적지까지 한 시간이 걸리는 식이죠. 더 빨리 가려면 오토바이를 잡으면 되고, 아예 며칠 렌트를 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차는 렌트해도 별 효용이 없으니 발리의 여행자들이 선택하는 건 대체로 바이크예요. 물론 도로 자체가 대부분 일차로라 한계는 여전합니다.


차가 불편하니 여유를 즐기며 걸어보려 해도 쉽지 않습니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인도와 차도의 경계가 불확실해서 위험한 구간도 많습니다. 가져온 유모차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짐처럼 굴리는 부부들도 심심찮게 보죠. 걷기가 너무 열악하니 웬만해선 택시를 타게 돼요. 발리의 택시 기사들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압니다. 전 목적지가 아주 멀지 않으면 조금 불편해도 참고 걷는 걸 좋아하는데 그때마다 지나가는 택시들이 경음기를 울려댑니다. 택시 지나가니 타라는 거죠. 처음엔 힘들면 내가 알아서 탈 텐데 왜 저러나 싶어 어리둥절지만 며칠 있어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습니다.


발리에서 자동차 경음기의 용도는 우리나라에서와 많이 다릅니다. 잠실 사거리에서 울리는 경음기 소리에는 뒤차의 짜증과 앞차의 스트레스가 덕지덕지 묻어 있어요. 차끼리만 그러면 다행이죠. 때로 차창이 내려가고 차 문이 열리며 그 안에 담겨있던 날 것의 분노가 폭탄처럼 터지는 장면을 우리는 이미 많이 봤잖아요. 발리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지 말란 법은 없지만, 최소한 이곳의 경음기는 그런 증오와 질책의 표현 수단은 아닙니다. 일단 볼륨이 우리나라 경음기의 절반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런 미약한 소리로 뭐 얼마나 큰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발리의 자동차 경음기는 도로 위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일상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좁은 골목과 사각지대가 넘쳐나는 발리의 도로여건 상 경음기 자주 울리는 건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일에요. 자연히 볼륨은 줄어들고 빈도는 늘어는 거죠. 우리나라도 경음기 볼륨을 전체적으로 좀 낮추면 좋겠어요.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에 대한 부담도 줄어들 거고, 또 느긋해 보이는 효과도 있거든요.


꼭 경음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느긋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문한 음식들은 기본적으로 10-15분 정도(정확히 재어본 건 아닙니다)는 기다려야 나와요. 회전율 좋은 맛집에 가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주문이 안 들어갔나 싶어 직원에게 물어본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마다 웃으며 준비 중이라고 하더군요. 호텔 조식에서 주문한 커피조차도 그랬으니 메인 디쉬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진 않았어요.  하든 서두를 필요 없는 것도 여행자의 특권 중 하나니까요.


음식 좀 늦게 나오면 어떻습니까. 여행인데.

발리 섬의 중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우붓에 가면 이런 느긋함에 양껏 취할 수 있습니다. 여기선 심지어 개들도 느긋해요.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개들은 그래도 부지런한 편이고, 대부분은 그늘에 누워 자고 있습니다. 그 개들 사진을 찍어오지 않은 게 참 아쉬워요. 만 찍어 올 걸.


우붓에 도착한 날, 우붓 왕궁에서 행사가 있었니다.  앞 도로가 사람과 차로 가득했어요. 저는 이런 축제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지난겨울, 스페인의 세비야에 3일 정도 머물렀는데 그때의 기억이 황홀하게 남아 있는 이유도 도시에 감도는 축제 분위기 때문이었어요. 늦은 밤까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노천의 테이블을 소박하게 채우는 술과 음식과 촛불과 말소리들, 작고 허름한 재즈바에서 이름도 모르는 음악을 서서 진지하게 감상했던 억. 이런 게 좋은 거죠. 우붓도 비슷했어요. 조용하고 느긋하지만 끊임없이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즐거운 역동감이 있었습니다. 이런 조화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친절과 배려라는 흔한 이야기가 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복작거리는 삶에서 그나마 편안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고마울 때 고맙다고 말하고 미안할 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고맙다는 사람에게 웃음으로 답하고, 미안하다는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거죠. 여행지에선 이게 일상의 규범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추억을 꾸려가는 데 있어서 친절과 배려만큼 중요한 건 없어요. 우붓처럼 한적한 마을에서 그토록 조화로운 축제 분위기가 연출될 수 있는 건 그 안의 사람들이 행하는 친절과 배려 덕분입니다. 물론 삶의 다른 측면도 다 마찬가지죠.


이곳이 우붓 왕궁입니다. 사진으론 작아 보이는데 실제로도 작습니다.

발리에서 마지막 며칠은 공항가까운 짐바란에서 보냈습니다. 울루와뚜 사원 방문한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계속 넓은 수영장이 딸린 호텔에서 종일 빈둥거렸죠. 수영하고 책 읽고 낮잠 자고 맥주 칵테일을 마시고 다시 수영하고 책 읽고. 전 수영은 잘 못합니다. 그냥 기분만 내는 거죠. 책은... 어쨌거나 아주 행복했습니다.


책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전 여행에 반드시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입장입니다. 평소 책을 잘 안 읽더라도 일단 가져가야 요. 좋은 휴가, 좋은 여행은 좋은 책으로 완성되기도 하거든요. 전 이번 2주간의 여행을 소설 한 권과 함께 했습니다. 2주 동안 한 권이라니 당히 두껍고 어려운 소설일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어요. 사놓고 아껴두었던 가벼운 SF였죠.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데뷔작인데, 결과적으론 실망했습니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한 권을 더 가져오거나 다른 책을 가져올 걸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무엇보다 반전이 너무 많았어요. 그것이 독자에게 미리 주어진 단서에서 파생한 조그만 반전이든, 캐릭터의 성격과 기능을 새로 설정하는 반전이든, 전체 이야기의 구조와 뉘앙스를 뒤집는 중요한 반전이든, 너무 남용되지 않는 게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단 공평하지 않잖아요. 독자 입장에선 사건의 촘촘한 인과와 인물 관계의 개연성에 익숙해지려면 상당한 수준의 몰입과 감정 이입이 요구되는데, 작가가 반전 한 방으로 손쉽게 이를 뒤집는 일이 자주 어나 허무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물론 작가는 최소한 독자보다는 더 몰입하고 이입해서 이야기 속 세계를 창조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불공평하다는 느낌은 여전히 남습니다. 심지어 그런 장치들은 남용되는 만큼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도 구구절절해지기 마련이라, 읽는 내내 피로가 배가되는 경향이 있어요. 어차피 지어낸 이야기인데 그런 작위적 논리에 설득당하기 위해 정성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그렇다고 여행을 망칠 정도는 아니었어요. 저의 경우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일상에서 누릴 수 없는 호사인데 겨우 이야기의 구조 때문에 기분을 망칠 수는 없죠. 아쉽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아내는 최근 수집 중인 해리포터 시리즈 중 한 권 가져가 읽었고요.


발리에선 호텔 수영장이든 비치 클럽이든 이렇게 누워서 책 보고 빈둥거리는 여행객들이 꽤 많습니다. 저에겐 이것도 여행의 낭만이에요. 하루 내내 정해진 일정이 선베드와 선글라스, 그리고 책뿐인 여행. 발리에선 가는 곳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저도 그렇게 지낼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이런 게 휴양지의 매력이고, 발리의 낭만이죠.


웰컴 투 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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