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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15. 2019

여행기 3

무단횡단과 거리 흡연과 소매치기에 대하여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매치기를 이번 여행에서 두 번 보았습니다. 런던에서 한 번, 바르셀로나에서 한 번. 유럽에는 여행객을 노리는 소매치기가 많다는 얘길 미리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말이 소매치기지, 남의 물건을 눈앞에서 강탈해가는 거니까요. 어떻게 유럽에는 이렇게 소매치기들이 기승을 부릴 수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여행 첫날 런던에 도착해서 호텔 체크인 후 짐을 풀고 나오니 벌써 날이 저물어버렸습니다. 계획했던 일정 대신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셨습니다. 1월 중순의 런던은 오후 3시 반부터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합니다. 4시면 거짓말같이 컴컴해지죠. 일정 꾸리기에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습니다. 여행의 절반은 날씨와 햇빛이 만들어주는데, 알다시피 영국의 날씨는 그리 친절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겨울이라 칙칙한 햇빛마저도 4시면 숨어버리니 멀리까지 와서 여간 아쉽지 않죠.


다음 날 아침 일찍 나와 산책을 한 뒤 시간 맞춰 왕궁의 근위병 교대식을 보러 갔습니다. 이날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엉뚱하게도 런던 시민들의 무단횡단이었습니다. 런던에서는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무단횡단을 합니다. 신호를 지키는 게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죠. 처음엔 이 나라의 도로 여건이 무단횡단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좁고 반듯한 도로들이 바둑판처럼 아기자기하게 놓여있는 런던의 중심가는 아이들을 위한 테마파크를 떠오르게 합니다. 좁은 차도 하나를 무단으로 건너는 데 큰 부담이 없어요.


하지만 며칠 더 지내보니 그게 다는 아닌 듯 보였습니다. 서울에선 좁은 차도라도 평소 차와 사람의 통행량이 많은 곳이라면 그리 쉽게 무단횡단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죠. 서로를 보는 눈이 일종의 견제장치로 기능하기 때문에 웬만큼 뻔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걸 매번 무시하긴 어렵습니다. 결국 차가 없어도 기다렸다가 초록 신호를 받고 다 같이 건너죠. 런던의 시민들은 그러지 않아요. 남이 건너든 말든, 신호가 빨간색이든 초록색이든, 차만 없으면 막 건넙니다. 원래 그러라고 만들어진 횡단보도라는 듯이.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긴 걸까요. 서울시민은 남의 눈치와 체면치레를 중시하고, 런던 시민은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져서?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반론의 여지가 있지만 저는 우리나라 시민들의 공중도덕규범과 준법정신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한국인은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고 하지만, 원래 문명은 일종의 위선 위에 건설되는 겁니다.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세상에 규범이며 제도가 다 무슨 소용일까요.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일상적 삶의 균형이 공동체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썩 훌륭하다는 사실이겠죠.


런던도 마찬가지입니다. 런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도로 위 삶의 균형은, 차가 없으면 그냥 건너는 거예요. 그 사람들에게 신호라는 건 차와 사람이 겹칠 때 우선통행 순위를 결정해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생각해보면 차가 없는데 사람이 신호를 기다려줄 이유가 없잖아요. 신호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사람이 신호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런던 시민들은 그 단순하면서 합리적인 논리를 실천으로 옮기며 사는 것뿐이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런던 시민들이 만들어낸 삶의 균형 또한 공동체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썩 훌륭해 보였습니다. 정말이지, 조금도 위험하지 않더군요.



반면 제 눈에 조금 위험해 보이는 것도 있었습니다. 바로 거리 흡연. 런던는 거리마다 애연가들이 넘쳐납니다. 담배연기에 한해서라면, 런던 거리에 청정구역이란 없어 보였습니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담배연기가 함께 하더군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광경이긴 하지만, 런던의 길빵(?)은 그 정도가 차원이 달라요. 금요일 밤 홍대나 강남의 술집 골목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흡연가들이 밤마다 사람 많은 거리를 비고 다니니까요. 순간 이곳 사람들은 간접흡연에 대한 인식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요. 아직까지는 흡연가들의 입김이 더 센 듯합니다.


언젠가 프랑스 사람들의 똘레랑스(관용)를 예찬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관용을 베풀려면 일상의 너저분함까지도 기꺼이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죠. 저자는 티 없이 말끔한 평양의 이미지와 각종 분변과 꽁초로 오염된 파리의 이미지를 설득력 있게 대조하며 자유의 가치를 역설했습니다. 진정으로 좋은 것들은 온갖 더러운 것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거죠. 맞는 말입니다. 평양의 깨끗함은 억압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런데 파리의 오염된 거리가 오직 자유만을 대변할까요. 더러울수록 자유롭다? 아무래도 이상하죠.


개인의 자유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도시환경 설계와 성숙한 시민문화의 정착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현대국가 대부분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그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는데, 그 한계라는 것이 대체로 타인의 자유입니다. 이 원칙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바로 형법의 집행이죠. 한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립한다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질서라고 하죠. 요컨대, 런던을 포함한 유럽의 몇몇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염된 거리는 단순히 자유의 증표라 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보다 자유와 질서의 줄다리기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거라는 강한 암시에 가깝죠.


저는 이걸 앞서 본 무단횡단과 관련지어 보았습니다. 서울시민은 차가 없어도 신호를 준수하지만 런던 시민은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서울시민은 거리 흡연에 일부 법적(모든 거리 흡연이 불법은 아닙니다), 규범적 제재를 받는 반면 런던 시민은 오히려 일종의 권리로 존중받죠. 예컨대 자유와 질서의 줄다리기에서 서울은 질서 우위, 런던은 자유 우위인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게 두 도시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줄다리기의 균형인 거죠. 저는 이걸 두 나라 국민들의 기질 차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글 처음에 밝힌, 소매치기 문제를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소매치기당한 사람들의 표정을 처음 보았습니다. 기분 좋게 여행 왔다가 난데없이 당한 사고에 울상을 짓고 있었죠. 바르셀로나에서 본 분은 제발 안에 든 여권만이라도 돌려달라며 한참을 쫓아가더군요. 외국 여행에서 여권을 분실하면 예약한 일정이 모두 틀어질 가능성이 높고, 재발급 일정마저 안 맞으면 비행기 티켓까지 수백만 원을 허공에 날릴 위험이 있습니다. 전 여행객 대상 소매치기가 명백히 중범죄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소매치기하다 잡혀도 며칠이면 풀려난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소매치기 붙잡으려다 괘씸해서 몇 대 때리면 훨씬 더 크게 처벌받는다고 합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이런 사고들에 더 강한 제재가 가해질 법도 한데, 현지 반응은 미온적인 듯하고요. 직관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이런 시스템이 무리 없이 돌아갈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앞서 무단횡단과 거리 흡연에 관한 얘기들을 하면서, 저는 그 나라 사람들이 살면서 만들어낸 일종의 균형이 있다고 썼습니다. 런던 시민들에게는 차가 없을 땐 빨간불에도 주저 없이 건너는 것이 횡단보도 위의 균형이고, 실외에서는 자유롭게 담배를 태우는 것이 거리에서의 균형입니다. (바르셀로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에게 전자는 썩 훌륭해 보였고 후자는 다소 위험해 보였지만,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하는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였죠. 하지만 소매치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매치기와 더불어 살아가는 광장 문화가 런던과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만들어낸 균형으로 보이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건 자유와 질서의 줄다리기에서 한 발 벗어나 반칙을 택한 사람들에 대한 제도적 방임입니다. 한마디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유럽인 특유의 기질과 관련지어 설명하곤 합니다. 또는 다민족 국가에서 소수 이주민들에 의해 흔히 벌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쉽게 결론 내리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건 사람들의 기질과 무관하게 벌어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소수민족에 의해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문제 또한 아니죠. (만약 그렇게 단정 지을 경우, 소수 이주민들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는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그보다 아직 제도가 미비할 뿐입니다. 최소한의 규범적 틀이 있고 규제가 있으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일종의 균형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 최소한의 틀이 없기 때문에, 애먼 여행객들이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거죠.


질서 우위의 사회와 자유 우위의 사회 중 어느 것이 더 좋을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지만, 여행객이 붐비는 곳마다 소매치기가 들끓고, 그로 인한 피해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이를 방치하는 사회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런던과 바르셀로나의 소매치기가 무단횡단이나 거리 흡연 정도의 비교적 가벼운 문제로 인식되려면 그에 맞는 제도적 고민들이 필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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