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Aug 22. 2019

어느 집밥의 역사

풀죽과 뼈다귓국과 쌈밥으로 이어진

#1 풀죽


 생전의 할아버지를 뵌 기억이 없지만, 엄마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된 엄마의 아버지는 분명 호인이었다. 자식들이 아무리 속을 썩여도 매 한 번 드는 일이 없는 분이었다. 허허 웃으며 "만지기아까운 내 새끼들"을 습관처럼 읊조리는 '지'가 엄마는 참 좋았다고 했다.


그 아지는 -엄마의 말에 따르면- '속없는 양반'이었다. 허름한 막일로 어렵게 번 돈을 버는 족족 술집에다 풀었다. 하루는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커다란 수레를 끌고 끙끙대며 둔덕을 오르는 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소녀 시절의 엄마는 그 모습이 그리도 슬퍼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꺽꺽대며 말없이 수레를 밀었다. 그날 엄마의 나이가 살 언저리였다.


엄마는 아지 앞에서 애교가 좀 있었다. 가끔 아지를 찾아가 제 두 눈 사이에 검지를 붙이고 빼꼼 웃어 보이면 는 흡족한 표정으로 10원짜리를 한 장씩 꺼내 주곤 하셨다. 손이 맵고 사나운 어머니보다 매양 구름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유유히 걷는 아지가 좋았다. 하지만 어느 시인의 말처럼, 먹는다는 데에는 어딘지 비루한 구석이 있어서 가장이 품위 있게 걷는다고 식솔들의 배까지 품위 있게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렸던 엄마를 포함한 일곱 자식들의 목구멍에 넘길 양식을 구해오는 일에 있어서 아부지는 그리 유능한 사람이 못되었다. 며칠 째 제대로 된 밥상을 마주하지 못해 비몽한 아이들로 들어찬 작은 방에서, 아부지는 영양가 없는 풀죽을 맥없는 자식들의 입가에 흘려 넣었다. 그 와중에도 내내 "아이고 내 새끼들"을 외치며 우시소리가 어렸던 엄마의 기억에 알알이 박혔다.




#2 뼈다귓국


어린 시절의 풀죽을 기억하는 엄마는, 가난이란 무슨 수를 써서든 멀리멀리 쫓아버려야 할 죄악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부자는 못 되어도 가난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처음에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책 속에는 가난해도 화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버젓이 실려 있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결론지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 내내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되려 풍족하다고 생각했다.  살 언저리를 지나던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게임기를 사달라고 발버둥 치며 울었다. 며칠 뒤 나는 우리 집 텔레비전 앞에서 겜보이에 팩을 꽂으며 흥분하고 있었다. 고생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 울어본  없는 나는 적어도 삶을 위협하는 가난으로부터는 안전거리를 확보한 셈이었다. 엄마가 바바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당신의 어릴 적 기억이 그저 어려웠던 시절의 옛날이야기로 소비되길 바랐다.


그 시절 우리 집 밥상에는 엄마가 '뼈다귓국'이라고 불렀던 희고 번들번들한 국물이 자주 올랐다. 송송 썰어진 대파와 굵은소금으로 각자 알맞게 간을 하고 밥을 말아먹었다. 이게 어딜 봐서 뼈다귀 국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소의 꼬리뼈로 우려내서 그런 거였다. 이걸 꼬리곰탕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에서도 팔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언젠가 엄마는 그 시절의 뼈다귓국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때 내가 악착같이 일만 할 게 아니라 가족들 건강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 그랬으면 그 위에 뜬 기름 정도는 걷어내고 먹었을 텐데. 그땐 그것도 육수인 줄 알고 휘휘 저어 먹었잖아. 몰라도 너무 몰랐지. 그러면서 엄마는 줄곧 가족 건강을 염려했다. 가난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다니면서도 가족 식사를 챙기기 위해 닷새 치 국물을 한 솥 가득 끓이던 과거의 엄마가 뭔가 잘못을 했던 걸까. 나는 엄마의 말에 아무 대도 하지 못했다.




#3 쌈밥


십 년 전만 해도 엄마는 집 앞 넓은 텃밭 혼자 일구다시피 했다. 밭을 갈고 모종을 심고 김을 매고 식탁에 올릴 잎과 열매를 땄다. 요령부득이라 일은 많았지만 수확량은 적었다. 엄마는 농사의 어려움을 손수 깨닫고 농부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흙 밟기를 좋아다는 엄마는 직접 기른 푸른 잎채소들을 한 바구니에 가득 씻어 담아 식탁에 올리곤 했다. 그러면서 밖에서 사 먹는 게 아무리 좋다고 해도 농약 안 치고 직접 가꾼 채소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했다. 쌈에 한 줌 밥을 담고 두세 가지 나물 반찬을 얹고 끝에 고추장이나 장을 살짝 올려 먹었다. 젖은 잎의 식감과 여러 채소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달콤쌉싸레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한 입 가득 싸서 우물우물 먹어도 좋고, 대가 센 채소를 골라 아삭아삭 어도 맛있었다. 먹기 좋게 차려진 고깃집 상추쌈과는 다른 집밥만의 투박한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평범하게 먹고살던 어느 날 문득,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동희야. 우리 이 정도면 부자 됐다.


텃밭이 돌밭이라 여러 해에 걸쳐 작물을 가꾸 열악했음에도, 수년간 우리 집 텃밭에는 갖은 작물들이 번갈아 자랐다. 그에 따라 자연히 식탁 풍경도 조금씩은 달라졌다. 어느 해에는 들깨가 풍년이었고 어느 해에는 옥수수가 풍년이었고 어느 해에는 고구마가 풍년이었다. 또 어느 해에는 키 작은 복숭아나무를 쉰 그루쯤 사다가 심었는데 이듬해 봄에 핀 복사꽃이 앙증맞게 아름다웠다. 여름이 저물어갈 즈음에는 무르고 못생겼지만 맛 좋은 복숭아를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그 모든 여름과 가을에 내가 그 집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부모님의 식탁은 분명 텃밭의 들로 채워졌을 터였다.




#4 집밥


대학생 때 자취를 시작해서 직장생활까지 십여 년을 혼자 살았다. 부모님 두세 달에 한 번씩 반찬을 가지고 오셨다. 필요한 김치부터 단골 정육점에서 진공 포장해온 돼지고기 목살과 얼린 국거리, 그리고 내가 절대 손대지 않을 쓰디쓴 나물무침까지 온갖 반찬이 보따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어차피 먹지도 않을 걸 네 엄마는 끝까지 싸온다고 안 하냐. 아빠는 투덜거리면서도 가져온 반찬을 빠짐없이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반찬들로 혼자 사는 아들과 집밥 한상 거하게 차려먹고 잠시 쉬다 떠나는 것이 그날 부모님 일정이었다. 자취방 크기에 맞춰 구입한 2인용 테이블이 좁아서 갓 지은 밥과 국, 예닐곱 가지의 반찬을 바닥에다 넓게 차렸다. 혼자 있을 때도 이러저러하게 해 먹으면 된다는 집밥에 관한 잠언들을 적당히 겨들으며 허겁지겁 밥을 삼켰다. 오늘이 가면 또다시 두세 달은 지나야 먹어볼 정겨운 성찬이었다.


서른 살에 중고로 첫 차를 구입하면서부터는 내가 집에 가서 반찬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마는 여전히 손이 커서, 한 번씩 고향집에 다녀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파김치와 무김치, 깻잎장아찌, 멸치고추볶음, 과일, 그밖에 몸에 좋다는 건강음료 따위가 두 손이 모자랄 만큼 두둑이 차에 실렸다. 자취방 냉장고에 남은 묵은 반찬을 꺼내 비우고 새것으로 채운 뒤 밥을 안쳤다. 런 날이면 칙칙 소리와 함께 좁은 방 안에 퍼지는 밥 냄새가 특히 좋았다.


지난해 결혼식을 올린 다음부터는 아내와 둘이 오손도손 차려먹는 밥이 집밥이 되었다. 전히 양가 어른들께 받은 반찬들로 냉장고의 절반을 채우긴 하지만. 하루하루를 잇는 집밥은 그렇게 유전처럼 대를 건너 흔적을 남기는 모양이다. 우리는 집밥을 먹으며 대체로 실없고 드물게 속 깊은 대화를 나눈다. 이런 일상의 대화도 어느 집밥의 유구한 역사에 오랜 추억처럼 흔적을 남기게 될까. 오늘치의 밥을 넘기며 나는 또 새삼스러운 공상에 잠긴다.

작가의 이전글 실수와 습관,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