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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을 좋아한다는 것

바라는 만큼 훌륭하진 않아도

by 달리

정소연의 단편 「앨리스와의 티타임」(2011)은 업무상 정기적으로 차원 이동을 하는 주인공이 다른 차원에서 앨리스 셸던 부인과 만나는 이야기다.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 이름이 20세기 미국의 SF 작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본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이 이야기의 주인공 역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차원 이동은 동화 속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입장하는 행위로 환유된다. 주인공은 다른 차원에서 만난 위대한 작가와 짧은 티타임을 갖는다. 그 세계에서 앨리스 셸던 부인은 그리 주목받는 삶을 살고 있지 않고, 심지어 글도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주인공은 또 다른 평행 우주에서 앤디 워홀이 없는 세계와 피카소가 끝내 무명으로 생을 마치는 세계를 목격한 바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의 인상적인 변주다.


정소연은 이 작품에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에 대한 존경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론 그와 같이 뛰어난 작가도 주목받을 수 없는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담담히 서술한다. 작품 속 세계관에 따르면, 세계란 원래 그런 것이다. 뛰어난 재능이 반드시 작품에 여과 없이 반영되는 것은 아니며, 하물며 유명세는 말할 것도 없다. 재능과 작품과 인지도가 서로 비례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희대의 예술가였던 피카소가 끝내 무명으로 생을 마감하는 세계에서 이야기 속 주인공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그보다 그 세계에서 피카소 본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계를 경멸하고 원망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재능을 저주하고 좌절했을까. 어쩌면 본인조차도 자신의 예술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일찌감치 다른 길을 찾아 나서진 않았을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도 작품을 매개로 한 교감이 없는 진공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피카소가 <게르니카>(1937)를 그릴 수 있었을까.


이제 글을 쓰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은, 그리고 나는, 글쓰기에 특별한 재능을 타고났는가. 혹시 정소연의 평행우주 속 피카소처럼 고결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아둔하고 비정한 세상의 귀퉁이에 홀로 버려졌을 뿐이라고 느끼진 않는가. 아. 물론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가끔은 터무니없는 공상에 빠질 자유가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어째서 나의 재능은 도무지 드러나지 않는가. 여기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1. 겸손―또는 그런 척을―하기 때문에.

(스스로 겸손하다 말하는 사람을 정말 겸손하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잠시 미루어두자.) 나는 적어도 이룬 것 없이 오만하게 구는 인간들의 초라함과 경박함을 답습하고 싶지는 않다. 겸손은, 미덕이라기보다 사회화된 인간이라면 갖춰야 할 최소한의 교양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2.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절반 정도는 맞을 것 같다. 주어진 재능에 마냥 사하며 살기엔 세상에 멋지고 아름다운 글이 너무 많다.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작게나마 못난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못내 처연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자주 그러는 건 아니고, 보통은 감탄하거나 마냥 재미있어하며 읽는다. 보통 이런 상태를 열등감에 빠져있다고 보진 않는 듯하다.


3. 객관적으로 재능이 없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할 수 없는 일에 평생 매달리는 것만큼 참한 일은 별로 없다.


4. 유명하지 않기 때문에.

말은 어딘가 미묘한 구석이 있다. 인지도가 없어서 아까운 재능이 묻히는 걸까, 아니면 재능이 없어서 주목을 못 받는 걸까. 가설을 검증할 길은 요원하다. 그래서 이 가설에 더 마음이 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곳은 '피카소가 끝내 무명으로 생을 마감'했다던 바로 그 세계가 아닐까. 역시 내가 형편없는 게 아니었어. 세상이 나를 몰라봤을 뿐이라고!


정말일까. 글쎄, 정말이든 아니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확인할 기회는 앞으로도 없을 텐데. 중요한 건 내가 이런 공상에 빠질 만큼 내 글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내가 쓴 글들이 정작 내가 바라는 만큼 훌륭하지 않아도 이만한 감정을 자아내기엔 부족함이 없다는 것. 내 글을 좋아한다는 건 그런 의미다. 바라는 만큼 훌륭하진 않아도.


글 쓰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지는 않겠지만 제 글에 대한 애착만은 누구도 쉽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앨리스와의 티타임」에서 내가 분명히 보고 느낀 것도 그런 애정 어린 마음들의 공명이었다. 당신은 어떤 우주에선 앨리스였을 수도, 또 다른 우주에선 피카소였을 수도 있는데, 지금 여기에선 당신이기 때문에. 글을 읽고 쓰는 내내 왔다 사라지는 모든 초라하고 행복한 감정을 소중히 간직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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