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호흡과 분량
알맞은 글의 길이는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대화할 때 유독 말이 길어지는 사람이 있다. 듣는 입장에서는 그냥 간결하게 답해주면 좋겠는데 꼭 온갖 설명을 덧붙여 가며 사람 지치게 한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고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끝까지 들었는데 결론마저 맹탕이다. 주변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사실 이건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은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서도 거의 무제한의 발언 기회를 독점할 수 있는 수단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은 짧은 대화로 압축하기엔 너무 복잡하다. 내 앞에 주어진 옵션 중 최선의 방안을 단박에 골라내고 싶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게 술술 풀리지는 않는다. 결국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A를 선택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지금 내 처지를 고려하면 B를 제외하는 것도 확신이 없고, 그래서 차선책으로 C나 D를 생각해봤지만 그러기엔 떠맡아야 하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 E로 가기엔 내 성격에 가능할 리가 없으니까, 결국 A와 B의 중간쯤에서 적당히 타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무래도 효율성 측면에서는 좀 아쉬울 것 같아서, 이러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봐 불안하고……."
"그래서 결론이 뭔데?"
"그냥 그렇다고. 계속 고민 중이야. 그런데 차라리 고민하지 말고 과감하게 지르는 게 나을까 싶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은 알겠지만 경험상 이런 지지부진한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상대가 원하는 수준으로 이야기를 짧게 끊을 재간이 없다면, 공연히 사람 괴롭히지 말고 혼자서 하고 싶은 말을 차분히 글로 옮겨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뒤죽박죽 엉켜있던 생각을 하나씩 꺼내어 문장으로 정리하다 보면 말로 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개운함을 느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문제의 쟁점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글을 쓴다고 해서 무겁게 고민하던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글쓰기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그렇다고 글을 쓸 때 마음껏 중언부언, 횡설수설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글이야말로 정제된 형태로 완성하지 않으면 좀처럼 독자의 시선을 끌 수 없는 매체다. 말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글을 써도 된다는 게 아니라, 때때로 복잡한 심경을 풀어낼 때 말보다 글이 유용할 때도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만약 당신이 매사를 복잡하게 꼬아서 생각하느라 사소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습관을 지녔다면, 본인이 글쓰기에 매우 유리한 기질을 타고났다는 점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분량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말을 길게 하는 버릇이 있다고 글도 무작정 길게 늘여 쓰면 아무도 읽지 않는다. 글에는 저마다 호흡이 있어서, 길게 써야 하는 글이 있고 반대로 짧게 써야 하는 글도 있다. 긴 글에는 그만큼 길게 쓰는 이유가 나타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짧게 끝낼 수 있는 얘기라면 무조건 짧게 쓰는 것이 원칙이다.
말은 짧게 할수록 좋고, 글도 짧게 쓸 수 있으면 무조건 짧게 쓰라니. 매사에 할 말도 많고 불만도 많은 나 같은 사람은 결국 설자리가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글의 분량은 ―고료를 받고 정해진 분량을 채워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전적으로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에 알맞은 글의 호흡을 생각하고 거기에 맞추어 분량을 잡는 건, 사실 글을 쓰다 보면 저절로 생기는 균형감각 같은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도 마찬가지다. 마음 가는 대로 썼다 지웠다 하면서 부담 없이 글의 분량을 채워나가다 보면 어느새 일정한 호흡의 글이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호흡의 흐름을 억지로 바꾸려들지 말고 자연스럽게 써 내려가는 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