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May 30. 2017

반항하는 아이

수평적 대화로 문제 해결하는 습관 기르기

간혹 우리는 아이들과 대화할 때 스스로 매우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어른이라 느끼며 뿌듯해한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요구를 파악하고,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런 자신을 만난 아이가 행운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 자체는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일이다. 긍정적 자의식은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 에너지를 주기 마련이니까. 다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아무튼 잘해줄 필요가 없어. 지금까지 네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어줬는데. 다른 아이들 같으면 이 정도도 고맙다고 할 거야. 너는 어쩜 그렇게 고집불통에 이기적이니? 지금 보니 네 말은 다 핑계일 뿐이고, 네 성격이 제일 문제야. 그 이기적인 성격만 고치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은 전부 해결될걸?"


대화로 잘 풀어보려는 나의 자존심을 아이가 끝끝내 허물어뜨릴 때 많은 어른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한바탕 내지르고 나면 무너진 자존심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단 한 번 폭력적인 언행으로 아이를 제압하거나 수치심을 안겨주면 그전에 공들인 모든 민주적, 수평적 관계는 모두 무너지고 만다. 물론 아이의 자존심도 함께.


'내 말을 언제 들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내리깔고 잘못했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그들은 나를 강제로 제압할 수 있는 강한 물리력을 가졌고, 그들이 으르렁거릴 때면 언제나 그 힘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어른과 아이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결국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식, 즉 물리적 강제력의 압도적 차이를 바탕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기술을 배운다.'


좋은 어른, 좋은 부모,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가끔 조급해지기도 한다. 들도 사람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가 이토록 노력하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못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주변 다른 사람들은 아이를 단호하고 거칠게만 다루던데, 이 아이는 하는 이야기마다 귀 기울여 들어주고 항상 잘해주니 버릇이 더 나빠지는 건가 싶은 생각에 불안하기도 하다.


아이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불안감은 또 다른 부정적 아이디어와 쉽게 결합하는데, 아이를 대하는 나의 민주적 리더십이 일종의 자비에 해당한다는 착각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렇게 잘해주는데도'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를 보고 '내가 그나마 민주적인 부모니까 이 정도지', '내가 이해심 많은 선생님이니 망정이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어른들은 대부분 그런 착각에 빠져있다. 아이와 나 사이에 이렇듯 민주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내가 꾸준히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대화'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런 사람은 언제든 아이를 상대로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을 선택할 수 있으며, 때로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렇듯 스스로 자비로운 어른이라 생각하는 착각 안에는 사실 처음부터 아이와 어른을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세상에 타인의 호의에 기대어야만 얻을 수 있는 민주적 지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 대립 상황에서도 상대의 자비에 호소하지 않는 것, 일방적 강압이 아닌 쌍방으로 오가는 대화와 타협에 의해서만 조금씩 해결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평등한 관계이다. 아이가 말을 안 들을 때 언제든 강제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은 아이와 그런 관계 맺기를 이미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꾸준히 참고 기다려왔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그런 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눈을 보고 이야기해. 당당하게 네 생각을 말하란 말이야. 그렇게 떳떳하면 상대 눈을 보고 자기 생각을 똑똑하게 말로 할 수 있어야지. 그렇게 주눅 들어가지고 무슨 대화를 하니? 결국 너도 지금 네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거야. 안 그래?"


우리는 어떤 경우에 상대의 눈을 보고 말할까. 믿음이 있을 때다. 내 말을 듣고 기꺼이 나와 같은 위치에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생각해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눈을 맞추며 대화한다. 이미 고정된 결론을 내어놓고 어떤 말에도 움직이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비장미 넘치는 사람 앞에서 우리의 눈과 귀, 입은 그 역할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어느 쪽일까.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결론은 이미 어른들만의 방식으로 정해졌고, 나는 그 결론에 공감하거나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공연히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내 생각을 말할 이유가 없다. 설득은커녕 서로 예의를 갖춘 대화조차 불가능할 테니까. 침묵이 최선의 전략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대화가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에 이 대화의 결말이 열려있는지 아니면 닫혀있는지를 본능적으로 눈치챈다. 어떤 말을 하든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리 없을 때 아이들은 침묵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본인에게 아무 효용가치가 없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다. 때로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데, 담백하고 단순한 문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경향을 더욱 뚜렷이 나타낸다.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습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냉담한 분위기를 잔뜩 품고 있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들이 무기력해지는 것은 스스로 잘못을 뉘우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그것을 반성의 여지로 읽는다. 스스로 잘못인 것을 알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릇된 사고방식이다. 정작 아이가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박탈해놓고서 그렇게 자의적으로 아이의 행동을 해석하는 것은 독단적 태도에 가깝다.


아이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해명할 기회가 필요하다. 잘못했다는 사실보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잘못을 할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믿음과 지지를 보내야 한다. 대화는 그런 믿음 위에서 간신히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아이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도 자기 입장만 말하며 변명하는 습관은 어릴 때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가장 좋은 방법은 변명을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상대에게 피해를 준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끝없는 대화로 알게 하는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그에 맞는 책임을 지도록 끈기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옳은 방법은 언제나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상대의 눈을 보고 진실하게 대화하는 자세는 물론 중요하지만, 대화할 때 눈을 보라고 '명령'을 해서는 안 된다. 눈을 마주 보는 행위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며, 그 바탕에는 언제나 신뢰가 깔려있어야만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수직적 관계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맞춤이 일어날 수 없다. 눈을 보고 대화에 참여하는 자세는 인내와 끈기로 길러지는 것이지, 몇 마디 말로 교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서 아이의 자존심까지 기어이 상하게 하는 태도로는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



아이와 어른의 관계에서 이해와 인내는 어른의 몫이다. 자존심도 마찬가지다. 자존심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끝까지 참고 이해하는 것은 어른이 해야 할 일이다. 아이가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고 해서 강압과 독단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힘들어도 끝까지 대화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옳은 방법이고, 또한 장기적으로 효과적인 전략이다. 그 어떤 큰 잘못을 했을 때에라도 우선 아이의 말을 믿고 들어주어야 아이는 진정으로 수평적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리더십 없는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