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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pr 07. 2018

성적이 낮은 아이

낮은 성적보다 아이에게 더 해로운 것은 낮은 자존감이다

넓은 의미에서 공부란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하나씩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이다. 세상을 경험하고 익히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아이들의 공부에도 엄밀히 말하면 정해진 길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거나 익히며 자라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으므로,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일정기간 동안 걸어가야 할 길을 제도적으로 매우 견고하게 다져놓았다. 그 결과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배우고 익히는 과정만을 공부로 인식하게 되었고,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평가를 통해 자신들의 공부 능력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스템은 전국의 수많은 아이들을 단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우는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경험에서 뭔가를 습득하는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성적이 낮으면 '나 공부 잘한다'고 말할 수 없는 시스템. 우리는 이 시스템을 학교제도라 부른다.



"성적이 이게 뭐니? 공부 좀 열심히 해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한 번 처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거 알지?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집중해서 열심히 해. 나중에 커서 힘들다고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아."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한국의 대다수 부모들에게 꿈과도 같은 자랑거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덕담 삼아 주위 아이들에게 건넨다. 물론 공부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하지만 공부 열심히 하라는 어른들의 덕담 속에는, 공부 못하면 커서 힘들게 살게 된다는 협박에 가까운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만큼 공부와 성적은 갈수록 척박해지는 시대에 최소한의 생존 가능성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지표로 기능한다. 이제 학생의 본분은 단순히 공부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바, 학생의 본분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아이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최악의 요인이다.


'공부는 어렵고, 재미도 없다. 공부도 소질이 있어야 한다는데 나는 공부랑은 영 안 맞는 것 같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공부를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어른들은 커서 편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나에게도 틀림없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어른들의 확신은 나를 지치게 한다. 어른들은 지금의 나보다 미래의 내가 이루어 할 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다.'


많은 어른들이 아이의 성공 기준을 막연한 이미지 형태로만 가지고 있다. 젊은 나이에 대기업에 입사한다든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을 느낀다든가, 높은 연봉을 받고 충분한 여가를 즐긴다든가, 많은 이의 부러움을 산다든가 하는 그런 이미지들. 그리고 그런 삶을 살려면 학생 때 남들보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믿는다. 전적으로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개연성이 한참 떨어지는 분석이다. 학생 때 성적은 결코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고작 학교 성적이란 변수 하나에 좌우될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높은 성적을 일종의 안전장치로 여긴다. 꼭 고액 연봉 전문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도, 미래에 대해 적어도 남들보다 많은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식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높은 성적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아이가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다. 성적이 안 오르는 아이에게, 나중에 하고 싶은 일 생겼을 때 발목 잡히지 않으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다그쳐봐야 오히려 자존감만 추락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높은 성적이 밝은 미래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낮은 성적이 어두운 미래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지만, 낮은 자존감은 매우 높은 확률로 암울한 미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래를 만들어가는데 있어 성적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다. 해도 안 오르는 성적을 붙잡고 실패한 경험이 쌓이면 자존감이 떨어지고, 이는 낮은 성적보다 아이의 미래에 훨씬 더 치명적이다. 차라리 '나는 원래 똑똑한데 평가 방식이 엉터리'라는 식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는 편이 좋다. 성적은 측정이 가능한 객관적 영역이고 자존감은 개인 내면의 주관적 영역에 존재하는데, 앞으로 우리가 맞을 사회는 개인 주관성의 끝없는 확장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십수 년 전부터 끊임없이 강조되어 온 '창의성'도 객관적 잣대로 측정하기 어려운 주관의 영역이 아니던가. 성적을 빌미로 아이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는 단편적, 객관적 기준 속 '성공'보다 아이가 내면적으로 느끼는 주관적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언제까지 공부만 해야 되냐고? 요즘은 대학 가서도, 사회 나가서도 계속 공부해야 한다더라. 남들 다 쌓는 스펙, 경험 너만 없다고 생각해봐. 취직이나 되겠니? 지금 하는 공부는 그때 할 것들에 비하면 연습해보는 정도밖에 안 돼. 네가 세상을 모르니 이렇게 엄살을 부리지. 나중에 한 번 겪어봐라. 얼마나 냉정한지. 게다가 이뤄놓은 거 하나 없는 사람 얘길 누가 들어나 줄 것 같아?"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의 현재를 미래에 대한 준비과정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이의 현재가 쌓여 미래를 만들기 때문이다. 빛나는 미래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느끼는 현재의 욕구를 억누르기만 하면, 억눌린 미래가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정말 아이의 행복을 바란다면 아이의 현재 욕구를 어느 정도까지 수용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비교적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아이의 모든 욕구는 건강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을 배우고 싶지만 학교 공부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학교 공부를 꼭 해야 한다면,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과 병행할 수 있기를 원한다. 내가 좋아하는 건 죄다 공부에 방해되는 일로 취급하면서 내내 꼼짝 말고 공부만 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가 나쁜 짓을 배우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존중해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른들은 제 삶의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일련의 원칙을 세워둔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어른들이 아이에게 하는 말과 행동, 생각과 태도에는 그런 원칙이 자연스레 묻어난다. 아이에게 '그런 쓸데없는 짓 할 시간에 책 한 글자라도 더 보라'고 말하는 어른은, 책을 읽히는 일이 아이의 욕구와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원칙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그 원칙이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의 욕구를 제한할 때 어른이 주로 사용하는 여러 조언은, 본질적으로 그들 자신의 삶을 반영한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성적이 좋아야 커서 성공한다'는 원칙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통해 공부와 성적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삶 안에서만 유효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몇 가지 원칙만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유연하다. 아마도 지금의 아이들이 커서 맞닥뜨릴 세상은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생각을 아이들에게 끝내 강요해야만 할까.


반면 '공부 못해도 아이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원칙은 다르다. 이것은 성적이 낮은 아이의 욕구에 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칙이라기보다 관용이며, 아이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이다. 공부뿐만 아니라 아이들 삶 전반에 영향력을 지닌 어른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어느 쪽일까.



성적이 공부의 질적 수준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적은 매우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행하는 학습 능력을 정교하게 측정한 결과일 뿐이다. 물론 이 제한적 학습 능력이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매우 중요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매 순간 유기적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는 조직 안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내고 중요한 업무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능력은,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학교와 학원에서 그토록 학습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이 여전히 중요하고, 무엇보다 사회에서 결정적으로 요구되는 핵심 역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제한적 학습 능력은 교육을 통해 폭으로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을 규정하는 수많은 요소 중, 그토록 협소한 부분만을 일률적인 평가의 대상으로 삼아 끝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우리나라의 공교육 체계는 분명 크게 병들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적은, 개인의 학습 능력이 실제로 중요한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기이한 숭배에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 흐름을 따라, 우리는 '공부 못하는 아이'가 자존감마저 잃지 않도록 항상 격려하고 위로해야 한다. 그렇게 건강하게 자란 아이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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