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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l 03. 2017

세계를 품는 인식의 광활함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우리는 흔히 한 인간의 인식이 드넓은 세계에 비해 지나치게 비좁다고 느낀다. 삶을 아무리 풍부한 경험으로 채운들 인간의 유한함이라는 본질적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한 인간의 삶에 남김없이 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세계는 무한한데 비해 인간의 삶은 찰나에 불과할 정도로 제한적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러한 인간과 세계의 이분법을 단숨에 바꾸어놓는다. 이 안에서 인간과 세계의 단편적 도식은 힘을 잃는다. 우리가 아는 바와 달리, 소설 속에서 세계는 한 인간의 인식을 오롯이 담기에 턱없이 비좁다. 끊임없이 세계의 본질과 속성을 탐구하는 '나(소설의 화자)'를 향해 조르바는 언제나 삶에 집중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무슨 뜻일까.


세계와 달리 한 사람의 인식은 자유롭다. 세계에서 허용되지 않는 모든 발칙한 망상과 허황된 공상이 개인의 인식 안에서는 자유로이 해방된다. 그러므로 세계의 본질과 규칙들에 앞서 존재해야 하는 것은 내 삶의 경험과 그로부터 느끼는 감정들이다. 행복과 고통이다(소설 속에서는 하느님과 악마로 은유적으로 표현되는데, 조르바는 시종일관 이 둘의 속성을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 그것이 곧 세계의 본질이며 삶의 규칙이다.


20세기 크레타의 광부 조르바의 인생은, 21세기 한국의 시민들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그의 기이한 행동과 거침없는 생각들은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차라리 망나니에 가깝다. 조르바의 인생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며 세워 온 윤리와 가치관을 뿌리째 흔드는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이처럼 현대인의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의 삶에서 딱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래서 독자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유'다.


조르바의 자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수준의 자유, 즉 '양심과 표현의 자유'의 수준을 훨씬 웃돈다. 그는 자기 삶의 결정권을 거의 무제한으로 행사하는 자유를 만끽한다. 과거의 사건에 매이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에 묶이지도 않으면서 그가 원하는 바대로 충실히 따르는 것은 오로지 현재의 욕구일 뿐이다. 조르바는 매 순간 현재의 자신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만 몰두한다. 한 인간으로서, 하나의 삶에 그보다 더 충실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조르바의 인생이 수많은 비윤리와 비도덕으로 얼룩져있음에도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에서 감동을 받고 자유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자신에게 이토록 미친 듯이 몰두해본 경험이 없거나 그런 경험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 기대들에 의해 매 순간 구속받는다. 그것을 관습이라 부르든, 사회나 문화나 규범이나 그밖에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의 현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모종의 법칙에 의해 단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토록 강력한 세계의 법칙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인식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넓은 세계를 품을 수 있으며, 얼마나 깊은 자유의 원천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자유의 원천으로서 인식의 영역은, 우리가 그보다 거대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세계 전체를 품고도 남을 정도로 광활하다. 인식은 곧 삶으로 이어지며, 자유로운 삶은 또다시 세계관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세계는(그리고 법칙은) 인식을 가두는 벽이 아니라, 끝없이 자유로운 광활한 인식의 디딤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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