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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n 22. 2017

거대한 상상의 무게

드니 빌뇌브, <컨택트Arrival>, 2016

* 스포일러 : 강함



압도적이다. 영화 <컨택트>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흔히 외계인과 UFO를 상상할 때 떠올리는 것들과 다르다. 세로로 길게 놓인 거대한 암석 같은 미확인 비행물체는 육중한 양감과 정교한 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끝없이 견고한 외계 물체의 외벽 앞에 선 인간은 그 정지된 거대함에 눌려 납작해진다. 갑자기 찾아온 혼란에 온 지구가 떠들썩하게 뒤집히는 동안에도 이 외계 물체는 말 한마디 없이 압도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어떤 역동성보다 더 큰 힘을 갖는 정체성(停滯性)을 목도한다.


영화는 곧 이 비행물체의 내부로 초점을 옮겨간다. 진입을 위해 백신을 맞고 소독을 하고 각종 안전장비를 착용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내부는 깨끗하다. 불필요한 위협과 의심이 배제된 공간. 이 공간에 진입하는 과정은 고전적인 클리셰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데, 이를테면 인간을 빨아들이는 레이저 안으로 들어가거나 불시착한 미확인 비행물체의 출입문을 뜯어내는 대신, 트럭 위에 설비한 소형 리프트에 5~6명의 인원이 타고 비행물체의 아래쪽 열린 문을 통과하여 올라가는 식이다. 긴 터널 같은 출입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구 중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설정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어두운 출입구 터널 끝에 대조적으로 배치된 눈부신 유리벽과, 그 유리벽을 매개로 한 '만남', 그리고 '소통'이다. 안개 자욱한 유리벽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두 외계 생명체와 언어학자 루이스의 첫 만남은 매우 극적이다. 빛과 어두움의 경계에서, 두려움과 호기심의 경계에서, 미지와 무지의 경계에서 서로 다른 존재가 맺는 관계의 고리는 위태로우면서도 희망적이다.


아슬아슬했던 첫 만남 이후 그들이 이어가는 소통의 형식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루이스가 외계 생명체를 향해 처음으로 내뱉는 말인 'HUMAN(인간)'은 일종의 존재 선언이다. 외계인의 존재를 가정한 상상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물음 즉, '첫 만남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이 영화는 존재의 선언을 주장한다. 대중이 궁금해하는 것은 '외계인이 지구에 온 목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루이스는 서두르지 않는다. 외계 생명체가 인간의 언어와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가정 위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원하는 정보를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루이스는 그저 담담하게 인사를 나눌 뿐이다. 여기서 인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과정이다. 즉, 영화는 어느 날 갑자기 미지의 세계가 눈앞에 닥친 극단적 설정 속에서도 일방적 정보활동보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소통에 무게를 둔다. 처음부터 그랬다. 앞서 말했듯 인간들이 우주선에서 내쏘는 레이저에 흡수되거나 문을 뜯어내지 않고도 무리 없이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은, 18시간에 한 번씩 아래쪽 문을 개방하는 외계 생명체들의 친절함에 빚지고 있다. 이렇듯 영화 속 모든 관계 맺기는 일방적이지 않고 매 순간 상호 신뢰를 높이는 방향으로 서서히 진행된다.


영화가 절정을 향해가면서 아주 중요한 장면 등장하는데, 바로 루이스가 유리벽을 매개로 하지 않고 허가 없이 캡슐을 타고 들어가 외계 생명체와 직접 접촉하는 이다. 이전에도 루이스는 허가 없이 방호복을 벗음으로써 외계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바 있고, 이는 분명 서로 다른 두 존재 사이의 관계 맺기에 도움을 주었다. 둘 사이를 안정적으로 매개하기 위한 장치(유리벽, 방호복)들이 오히려 둘 사이의 진정한 소통을 방해하고 있을 때 이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대담하게 해체함으로써 위기에 놓인 관계를 한 단계 진전시키는 것이 루이스의 역할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 생명체의 이미지 또한 기괴하기 짝이 없다. 영화에서 '헵타포드'라 명명되는 외계 생명체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 속 외계인의 모습과 큰 차이가 난다. 분명히 눈 앞에 존재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지 앞에서 인격적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무모해 보인다. 루이스와 함께 팀으로 오게 된 수학자 이안도 처음에는 언어를 매개로 한 인격적 대화보다 고도로 추상화된 수의 나열을 통한 정보의 교환이 합리적 접근 방식일 거라고 판단한다. 언어를 매개로 한 소통이 불가능할 때, 서로 원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파악하고 주고받는 데에 수학이 매우 익숙하고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소통의 수단을 모두 본질 밖의 것으로 이해함과 동시에 시종일관 소통 그 자체의 의미와 목적에 천착한다. 루이스가 소통을 위한 장치로 기능하는 방호복과 유리벽을 해체하는 것은 모두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영화의 핵심은 헵타포드의 언어 체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외계 생명체들도 자신의 존재 선언으로 대화를 시작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그들의 문자 이미지는 생소하고 복잡하며 기이하기까지 하다. 그들의 모습만큼이나 기이해 보이는 원형의 문자 체계에서 인간이 해득할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이렇듯 인격적 대화를 위한 수단이 전무하고 심지어 상대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영화는 기발한 재치를 선보인다. 이안은 이 두 외계 생명체에게 1940년대 미국 코미디 듀오의 이름을 따 '애봇'과 '코스텔로'라는 이름을 지어주는데, 이들은 수많은 패러디를 낳은 '1루수가 누구야(Who's on First?)' 개그의 주인공이다. 이들의 유머는 원래 기발한 언어유희를 이용한 것이지만, 이안은 대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유된 지식조차도 없는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이들 이름을 차용한다. 이안의 다소 엉뚱한 제안에 루이스는 슬며시 웃으며 찬성한다.


처음부터 중반 이후까지 온갖 괴이한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속에서도 영화는 핵심 메시지를 향해 묵직하게 나아간다. 헵타포드의 원형 문자 체계는 시간에 매인 인간의 삶을 해방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즉 선조적 형태의 삶을 비선형적, 회귀적 형태의 삶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인간의 삶을 접점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들 언어의 핵심 기능이자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영화의 시작부터 계속 교차 편집되었던 루이스의 딸 한나의 에피소드는, 분명 루이스의 '기억'에 존재하지만 루이스 본인도 정체를 알 수 없어 헤맸던 '미래'였다. 헵타포드를 만나 그들의 언어를 익히기 전까지 루이스는 이 '미래기억'의 의미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다 헵타포드 언어의 회귀적 기능, 즉 시간을 열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도록 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를 익히고부터 그 알 수 없는 소녀가 자신의 딸임을 명확히 인지하게 된다. 현재의 에피소드가 딸의 죽음이라는 과거 사건 이후에 일어나는 일인 줄만 알고 있던 관객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점의 역전을 경험한다. 딸 한나의 죽음은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분명 과거가 아닌 미래의 사건이며, 루이스는 이 미래의 사건을 현재 시점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스가 경험하는 시점의 역전은 곧바로 영화의 핵심 메시지와 연결된다. 루이스는 현재의 경험에서 미래의 딸의 질문에 대한 답(논제로섬 게임)을 찾기도 하고, 미래에서 만난 고위 인사와의 만찬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아내의 유언)를 찾기도 한다. 즉, 헵타포드의 언어를 통해 얻은 삶의 회귀성을 현실에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루이스는 자기 삶을 통틀어 가장 중요했던 문제인 딸의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 선조적 시간의 끝에서 반드시 마주쳐야 할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알면서도, 그 고통을 기억하면서도 애써 회피하지 않는다. 그것은 헵타포드와의 만남에서 소통의 수단보다 그 의미와 목적을 더 중시했던 루이스의 태도, 철학과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한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행복과 고통을, 그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경험과 감정들을, 일종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기로  것이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루이스는 담담한 모습으로 '다시' 이안과 결혼해 한나를 낳기로 결심한다.


결국 영화는 우리에게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요구한다. 목적은 수단과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는 자명한 공리를 깨우친다. 거대한(또는 몽환적인) 여정 끝에 이토록 묵직한 결론을 배치할 수 있는 상상의 무게가 진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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