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Apr 25. 2022

우리가 영영,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안희제×이다울, 『몸이 말이 될 때』, 동녘, 2022

가끔 너무 뻔한 말들의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 다. 확신으로 가득한 혐오와 배제의 말들. 그들이 그럴 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매번 새롭게 놀라는 것은 그 잔혹함과 저열함 탓이다. 어떻게 저런 말들로 살아있는 누군가를, 살아보려는 누군가를 조롱할 수 있는가. 환멸과 함께 질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역시 너무 뻔하다. 놀라움과 진부함의 공존. 예측 가능한 그들을 보는 일은 이렇듯 혼란스럽다.


경험이 늘어갈수록 확신은 옅어진다. 어떤 영역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말과 쓸 수 있는 글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지레 그렇게 결론짓고 입을 닫는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누구로부터도 상처받지 않는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을 택했다는 환각 속에 살기로 한다. 어쩌면 그건 내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기에 가장 어울리는 방법일 것이다. 내가 잘못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딱 그만한 거리감을 낳는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산다. 나와 맞은편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혐오자들이 틀렸다는 확신이다. 그것이 곧 내가 옳다는 뜻은 아니다. 옳은 길을 가는 일은 틀린 길을 피하는 일에 비해 많이 어렵고, 용기가 필요하며, 부지런해야 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옳음에 대한 욕망을 반쯤 체념한 채로, 최소한의 윤리를 최선으로 여기며 산다. 혐오를 틀림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미미한 실천의 일환이다. 그들이 틀렸다고 나는 확신한다. 인생을 깃털처럼 사는 이들과,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발언 기회와, 혐오를 실어 나르는 확성기와, 그에 감응하고 동조하는 자들의 섬뜩한 환희와, 그 모든 선하고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가해가, 최종적으로는 나쁜 일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나의 이런 확신에 찬 말도 맞은편의 누군가에겐 놀랍고도 진부하게 느껴질까. 알 수 없다.


삶이 보다 단순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옳은 일과 그른 일을 손쉽게 분간할 수 있는 세계라면 이런 고민도 다 필요 없을 것이다. 예컨대 나는 나의 반대편에 서있는 혐오자가 틀렸다는 확신 속에 산다고 말하지만, 세상에는 나와 그들 사이 어딘가에 서있는 이들도 무수히 많다. 어쩌면 '반대편의 존재'라는 이미지부터가 필요에 따라 불러낸 망상일 수도 있다. 복잡한 현실에 겨우 쌍방의 대립구도라는 도식을 갖다 붙인 건 내 모자란 상상력의 한계일까. 이쯤 되면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안희제, 이다울 두 작가가 주고받은 스무 편의 편지글이 실린 책 『몸이 말이 될 때: 우리의 세계를 넓히는 질병의 언어들』을 읽고 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이 책이 현상으로서의 혐오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혐오와 배제의 언어를 굳이 언급하며 본의 아니게 횡설수설하는 까닭은, 그것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먼저 꺼내놓지 않고는 도무지 책에 대한 감상을 끝까지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삶에는 혼란과 망설임, 그리고 어색한 머뭇거림 속에서만 간신히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두서없는 문장으로만 간신히 이어지는 마음들이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자주 목격한 것은 흔들림이다. 아마도 처음 기획과 많이 달라졌을 결과물 안에는 차이와 불일치, 혼란과 흔들림의 기록이 들어 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점이 좋았다. 흔들리는 것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생각 안에서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어쩌면 확신이란 것도 흔들림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흔들리는 확신이라니, 좀 이상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우리는 모든 흔들림 앞에 조금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안희제와 이다울은 제각각 아픈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 자신을 소개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이 질병과 고통으로만 환원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안 그렇겠는가. 어떤 이에게 질병은 그 자신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겠지만,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그것이 곧 그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한 사람을 몇 개의 키워드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자주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초에 타인을 빠짐없이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오만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만함은 의미 없이 모인 단어들처럼 금세 흩어지고 단절된다. "네 마음 이해해."란 말이 경우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 수 있는지 이미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결국 어떤 것은 영원히 미지의 영역에 있다. 그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연결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저자들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질병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통증이 나를 덮쳐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나와 그들 사이의 연결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아프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과 다른 아픔의 당사자이다. 그리고 이 책을 쓴 두 작가의 관계 또한 그렇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아픔의 당사자이고, 이들이 자신의 아픔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어떤 연결의 순간을 경험했다면 나와 그들 사이에도 유사한 연결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영영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뻔한 말들의 사막에서 반가운 비를 만난 기분이다. 이들이 쓴 글을 읽고 있으면 주변의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배려와 관심이 깃든 신중하고 날카로운 질문들. 그런 문장은 단 한 줄도 뻔하게 쓰여지지 않는다. 이어질 편지의 내용을 예측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 그것은 이 책의 부제처럼 세계를 넓히는 경험, 기존에 알고 있던 틀이 무용해지는 경험에 가닿는다.


이런 언어에 대한 감상을 글로 적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다녀간 그 복잡한 결의 감정을 그들과 같이 세밀한 언어로 옮길 수 있을까, 그 미묘한 순간들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끝내 포착해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설익은 감상을 적는 일은 자칫 실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의 몸이 먼저 말이 되어 나의 마음을 두드렸으니, 그에 화답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당신의 차례이다. 나의 아픔이 당신의 세계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고 당신의 아픔이 나의 세계를 설명하는 언어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한층 더 넓어진 세계를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영영,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닿지 못한 사실들 앞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