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Jul 05. 2022

해방, 삶이 지향하는 필연

발리 카우르,『정숙한 과부들을 위한 발칙한 야설 클럽』, 들녘, 2022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발리 카우르 자스월의 소설 『정숙한 과부들을 위한 발칙한 야설 클럽』의 원제는 'Erotic Stories For Punjabi Widows'이다. 직역하면 '펀자브 과부들을 위한 야한 이야기'. 펀자브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계에 위치한 인구 1억 이상의 광대한 지역이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펀자브가 아니다. 중요한 일들은 모두 런던에서 일어난다.


왜 런던인가. 런던에서 펀자브 과부들을 위해 무슨 발칙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걸까. 그것은 왜 그들의 고향 땅 펀자브에서는 발화될 수 없는가. 이쯤에서 독자는 펀자브 출신 여성, 특히 과부들의 금기에 관한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은밀한 공상의 세계에서마저 지독한 자기 검열에 시달리게 만드는가.


작품의 배경이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도식에 따르면, 런던과 펀자브는 문화적으로 양극단에 위치한다. 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런던은 자유와 선택권을, 펀자브는 수구와 검열을 의미한다. 단순히 의미하는 것을 넘어 각각의 공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부여하고 수행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런던과 펀자브, 둘로만 치환될 수 없는 다른 수많은 공간이 존재하지 않던가. 바로 여기에서 두 문화권의 중간 지점이 파생된다.


흔히 리틀 펀자브라 불리는 런던 서쪽의 '사우스홀Southall' 지구는 그 모든 가치가 뒤섞여 혼재하는 과도기적 공간이다. 런던에 거주하는 '정숙한' 펀자브 과부들은 대부분 사우스홀을 중심으로 전통적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그러니까 이건 이주와 정착이 안정기에 접어든 시점에조차 이전 세대의 억압적인 문화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그런 이들이 모여서 나누는 야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이미 짜릿한 해방이고, 한편으로는 은밀히 공유하는 죄책감이자 안도감이며, 종국에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지향하는 필연이다. 이 맥락에서 '야설Erotic Stories'은 페미니즘의 동의어이며, 야설의 주체는 명백히 페미니스트로 환원된다.


주인공 '니키'는 사우스홀 시크교 센터에서 주관하는 여성을 위한 글쓰기 수업에 강사로 지원한다. 수업을 기획한 '쿨빈더'는 니키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여성 대상 사업을 곱게 보지 않는 센터의 압력 때문에 서둘러 채용하고 수업을 시작하기로 한다. 하지만 수업 첫날, 니키는 수강생으로 온 펀자브 과부들 대부분이 창작 글쓰기는커녕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한다. 결국 성인 대상 문해교육으로 방향을 틀어보지만 분위기는 얼마 못가 시들해진다.


비록 글은 쓰지 못해도 과부들은 가십 소비에 능하다. 그들은 런던에 사는 펀자브인들의 사생활을 낱낱이 파헤치고 소문을 공공연히 실어 나른다. 니키는 커뮤니티에 도는 가십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과부들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성적인 이야기에 점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는 은밀하고 선정적이고 얼핏 저속하게까지 느껴지지만 끝내 무시할 수 없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이 에너지에 주목한 니키는 과부들이 말로 창작한 이야기를 채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니키와 수강생들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메시지의 핵심은 여성의 욕망을 금기시하는 문화를 깨부수는 일이 바로 그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데에 있다. 펀자브 과부들의 야한 이야기가 단순히 철없는 여성들의 경거망동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변에 엄존하는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이들의 단호한 의지는, 부조리한 시대의 금기에 정면으로 맞서던 혁명가의 결기에 유감없이 포개어진다. 함께 야설을 쓰고 돌려 읽던 '정숙한 과부들'이 모종의 변화를 경험한 뒤, 위기에 빠진 니키를 구하기 위해 연대하는 모습은 이 작품에서 가장 필연적인 장면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영영,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