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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l 08. 2022

인간보다 나은 인간

오서하, 『나를 닮은 친구 A.I.』, 머스트비, 2021

* 쪽수: 168



AI를 주제로 하는 옴니버스 단편집입니다. 여덟 편의 짧은 동화가 실려 있습니다. 책의 제목이 곧 핵심 메시지이긴 한데 그렇게만 말하면 너무 단순해 보이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섬세하고 복잡한, 그러면서도 매우 익숙한 맥락 위에서 서사를 전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AI(또는 클론이나 로봇)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몇 개 떠올려 보세요. 그중에는 인간의 것과 흡사한 욕망을 가진 AI의 이야기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소설이나 영화 속 AI는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는 AI와 많이 달라요. 많은 작품 속에서, 충분히 발달한 AI는 그냥 인간입니다. 다른 무엇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엔 인간이에요. 심지어 평균적인 인간보다 더 나은 인간입니다. 그들은 하찮은 본능에 이끌려 고차원적 목표를 그르치는 실수 따위는 저지르지 않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AI가 자아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자유의지를 갖게 되고, 결국 인간의 자리를 탐낼 것이라는 상상은 이 바닥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레퍼토리 중 하나입니다. 인간을 정복하거나, 시기하거나, 흉내 내거나, 그밖에 뭐가 됐든 간에 그들은 인간의 지위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 그만큼 뛰어나서는 당연히 아니고, 그냥 이런 작품들을 전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인간들은 대부분 유아기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실체도 불분명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 책에 등장하는 AI도 역시 일련의 인간적 기질들을 흉내 냅니다. 「꿈 저장소」의 '로디릭'은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으려 하고, 「동키의 웃음」에 나오는 간호 로봇 '동키'는 인간의 슬픔에 공감하고 싶어 합니다. 「우주 삼총사」에 나오는 '우주'는 아홉 살 아이처럼 행동하고, 「내 친구 통돌이」에 나오는 '통돌이'는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지요. 「이름은 있어야 해」에서는 청소 로봇과 눈사람 로봇이 임신한 길고양이를 보살피고, 「내 꿈은 부모」에서 AI 고양이 '페르난도'는 버림받은 AI 강아지의 부모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눈에 의미 있어 보이는 이유 또한 단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AI를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동력은 뭘까요. 일단 음부터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도록 설계되었을 수 있겠죠. 「우주 삼총사」의 우주가 그런 경우에 가깝습니다. 그게 아니면 설계자의 오류가 내재되어 있었을 수도 있고, 우연한 계기를 맞아 AI 스스로 욕망을 갖게 되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조금씩은 어색하지만 이야기가 꼭 자연스러워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예컨대 저는 이런 이야기들이 종종 로봇 청소기가 청국장을 끓여먹는 것만큼이나 어색하게 느껴지곤 하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도 충분히 미로운 발상일 수 있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기념비적인 걸작이라 여기는 sf 작품들도 실은 다 비슷하게 어색한 면들이 있요.


한편 「용기의 가면」과 「마루의 그림」은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를 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욕망을 품은 AI가 등장하지 않아요. 「용기의 가면」은 AI 분신에게 자기 정체성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이고 「마루의 그림」은 지구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공식적 기억에서 지워버린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입니다. 흔하고 익숙한 이야기이고 무슨 말을 하려는 지도 알겠는데 다만 짧은 분량이 메시지를 충분히 커버하지 못한 느낌이 들지요.


이중 가장 좋은 작품을 꼽으라면 전 「내 꿈은 부모」를 고르겠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인간이 기계를 껐다 켜는 것과 같은 일방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AI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인본주의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로봇을 포함한 여타의 존재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그건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호혜적인 태도 위에서만 가능할 거예요. 「내 꿈은 부모」는 그런 생각거리를 진지하고 신중하게 녹여낸 좋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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