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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과 절제의 아름다움

김종관, <더 테이블>, 2017

by 달리

* 스포일러 : 중간




어느 카페의 한 테이블에서 하루 동안 오고 간 서로 다른 네 개의 대화. 특별한 것도 없고 주목할 부분도 딱히 보이지 않는 설정 속에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각 대화 상황은 서로 다른 인물들에 의해 서로 다른 줄기로 흘러간다. 유명 배우 유진(정유미)과 전 남자 친구 창석(정준원)의 대화는 어색하다. 한 때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아무 의미 없어 보일 정도로 둘 사이의 거리는 멀기만 하다. 창석은 창 밖에서 유진을 알아보고 카페 안으로 들어와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 요구하는 두 학생들을 부드럽게 타일러 돌려보낸다. 뜻밖의 배려를 받은 유진은 창석을 향해 웃어 보이지만, 이후 대화가 이어질수록 옛 친구에 대한 추억이나 반가움보다 지저분한 루머의 사실 여부에만 관심을 보이는 창석에게 피로와 반감을 느낀다. 결국 대화가 끝나갈 무렵 회사 동료에게 유진과 함께 차를 마시는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창석을 보고는 끝내 실망하고 만다.


두 번째로 테이블을 찾은 경진(정은채)과 민호(전성우)의 대화는 이보다 담백하다. 세 번의 만남 후 하룻밤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은, 그 후 몇 달간 만나지 못했다. 민호는 인도와 유럽 각지로 여행을 떠났고, 경진은 민호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받지 못했다. 경진은 민호에게 작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고, 민호는 경진에게 여행 중 생각나서 샀다며 헌 시계를 선물로 건넨다. 한 달쯤 전에 한 잡지사에 취직한 경진은 음식을 묘사하는 글로 돈벌이를 시작했고, 아직 무슨 일을 할지 몰라 막막한 민호는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해줄 테니 먹어보고 글로 표현해줄 수 있느냐며 너스레를 떤다. 그렇게 둘은 민호의 집을 향해 카페를 나선다.


다음은 은희(한예리)와 숙자(김혜옥)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결혼 사기단이다. 은희는 적당한 남자를 찾고, 상견례와 예식장에 가족으로 등장할 배우를 섭외한다. 숙자는 이번 사기에서 은희의 어머니 역할을 맡아줄 배우다. 충분히 당혹스러운 설정이지만, 더욱 당혹스러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 사기 결혼의 상대는 은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인 것이다. 재산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숙자는 마치 딸을 대하듯 따뜻한 조언을 건넨다. 물론 결혼 사기는 계획대로 진행되겠지만, 대화에서 둘의 진심은 서로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테이블을 찾는 커플은 혜경(임수정)과 운철(연우진)이다. 둘은 옛 연인관계이다. 혜경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운철은 혜경에게 애틋한 감정과 일말의 미련을 남겨둔 듯하나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혜경은 그런 운철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운철보다 조금 더 솔직한 말들로 대화를 이어간다. 카페 밖으로 나와 기약 없이 헤어지기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바라보며 마음을 주고받는다. 아마도 둘의 만남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네 번의 대화에서 가장 뚜렷이 느껴지는 이미지는 균형이다. 네 번의 대화는 모두 일대일로 이루어지며, 어느 누구도 대화의 주도권을 독점하지 않는다. 영화 속 이야기가 전개되는 단 하나의 테이블은 긴 타원을 그리며 스크린을 균형 있게 채우고, 각각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차와 찻잔, 케이크의 배치와 그것을 담는 수직의 카메라 앵글까지 영화는 균형미로 가득하다. 각 대화가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어느 하나 지나치거나 부족함 없이 균형을 이룬다.


출처 : 영화 <더 테이블>


알다시피 균형을 유지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상대를 향해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표정과 말투에 귀 기울이며 끝까지 균형을 유지한다. 이 균형 속에서, 대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매우 정갈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대화의 내용이 다소 상식에서 벗어나거나 무례하게 흘러갈 때마저도 그것을 직시하는 데 큰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균형이 주는 안정감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다.


이 영화에서 강조된 또 하나의 이미지는 절제이다. 균형과 잘 맞는 한쌍으로서, 절제가 주는 아름다움도 이 영화가 갖는 중요한 특징이다. 이 영화는 인물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클로즈업 기법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감독은 대화의 메인 캐릭터로 등장하는 네 명의 여인을 연기한 여배우들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강조하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클로즈업은 대체로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기 위해 쓰이는 기법이다. 관객들은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인물의 얼굴과 표정, 눈의 떨림, 작은 고갯짓,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를 보고 들으며 그들 내면의 마음과 감정을 짐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것 말고도 아주 중요한 기능이 하나 추가된다. <더 테이블>의 클로즈업은 인물 내면 묘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배우의 외면 그 자체에 몰입하게 한다. 이야기 속 '인물'에서 벗어나 이야기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배우'의 아름다움을 살려낸다. 영화는 배우가 가진 곡선미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담아 마치 정지된 공간에서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들게 한다.


출처 : 영화 <더 테이블>


그러는 동안에도 영화는 꾸준히 절제의 미를 선보인다. 네 개의 스토리 중 어느 것도 고조되지 않고, 여덟 명의 인물 중 어느 인물의 감정도 격앙되지 않은 채로 테이블은 막을 내린다. 70분짜리 영화적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효과적이지 못한 전략일 것이다. 이야기의 전개에서 위기와 위기의 해소, 그리고 결말로 이어지는 스토리 라인에 익숙한 관객들은 이러한 절제의 미에 끌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독이 이를 몰랐을 리도 없다. 그럼에도 이렇듯 균형과 절제의 미를 특유의 무게감으로 풀어낸 힘과 의지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더 테이블>이 지나치게 남성화된 한국 영화 산업의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 아주 좋은 영화로 기억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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