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밀스, <우리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
* 스포일러 : 강함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1979년, 산타바바라의 어느 하숙집을 배경으로 어머니 도로시아와 아들 제이미의 관계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어낸다. 여러 인물의 서로 다른 시각과 기능을 통해 중첩적이고도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관계의 혼란, 그리고 이해와 성장의 이야기는 순간순간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도로시아(아네트 베닝Annette Bening)에게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Lucas Jade Zumann)는,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무의미하고 따분한 일상을 살아가는 다음 세대의 상징적 인물이다. 커갈수록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제이미를 보며 도로시아는 혼란스러워한다. 반면 제이미에게 있어서 어머니 도로시아는 비참하고 가난했지만 인정과 생기가 흘러넘쳤던 지난 세대를 상징한다. 제이미는 많은 이들이 흔히 그러듯 어머니 또래의 사람들을 '대공황Great Depression 세대'의 틀로 바라본다. 도로시아는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없는 어린 나이의 제이미를 데려가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고, 학교에 거짓으로 결석 사유서를 제출한 제이미를 야단치기는커녕 더 적극적으로 사유서를 작성해 제이미의 결석을 돕는다. 기존의 관습과 그로부터 오는 압박에 정면으로 맞서는 어머니를 보면서 제이미는 어렴풋이 지난 세대의 정의감 같은 것을 느낀다.
이렇듯 자기 나름의 세대 프레임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곧 아주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친구들과 기절놀이를 하다가 쓰러져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가 30분 만에 깨어난 제이미를 보며 도로시아는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제이미와 자신 사이에 넘지 못할 벽이 있음을 느낀다. 도로시아는 하숙집에 세 들어 사는 애비(그레타 거윅Greta Gerwig)와 제이미의 친구 줄리(엘르 패닝Elle Fanning)에게 제이미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한다.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황한 애비와 줄리는, 같은 남자로서 대화할 수 있는 윌리엄(빌리 크루덥Billy Crudup)에게 부탁할 것을 권하지만 도로시아는 확고하다.
이제 애비와 줄리는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제이미와 교류한다. 24살 애비는 15살 제이미에게 좋은 가정교사가 되어 줄 수 있는 훌륭한 자질들을 가지고 있다. 애비는 제이미에게 음악에 담긴 자유로운 철학과 기분 내키는 대로 춤추는 법을 알려줄 수 있고, 제이미가 짝사랑하고 있는 줄리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충고해줄 수도 있다. 그것도 줄리가 옆에 누워 모든 대화를 듣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이토록 대담하고 거칠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애비는, 어린 제이미가 다른 누군가에 종속되는 삶을 살기보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삶을 살도록 일관되게 조언해줄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다. 영화 중반, 애비가 제이미에게 건네는 페미니즘 교재는 제이미가 종속적 삶에서 주체적 삶으로 다가설 수 있는 일종의 지침서로서 기능한다. 페미니즘에 눈을 뜬 제이미는 기존의 억압적이고 일방적인 성관념에 물든 또래 친구와 맞서 싸우게 되고, 그날 밤에 애비와 클럽으로 향한다. 이 모든 일이 너무 급진적으로 느껴지는 도로시아는 결국 애비에게 했던 부탁을 철회하고 만다.
한편 17살 줄리가 제이미에 대해 갖는 강점 또한 명확하다. 둘은 친구이기에 누구보다 서로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줄리는 자신을 향한 제이미의 사랑과 욕망을 이해한다. 제이미는 자신과의 우정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하는 줄리의 걱정과 고민을 이해한다. 둘의 관계는 상호 주관적이며, 서로를 향한 호의로 무장되어있다. 이 영화에서 도로시아의 하숙집 외벽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제이미의 방 창문으로 직접 들어가는 인물은 줄리뿐이다. 둘만의 통로에 초인종이나 노크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제이미는 줄리를 사랑하며, 줄리는 제이미를 걱정한다. 둘의 서로 다른 진심은 결국 제이미가 줄리를 거부하게 만들고, 제이미를 혼자 두고 떠날 수 없는 줄리는 차라리 함께 떠나자고 말한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여행은 둘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고, 다툼 끝에 둘은 모두의 위로를 받으며 제자리로 돌아온다.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제이미의 독백으로 끝을 맺는다. 도로시아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제이미는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는다. 아들에게 도로시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제이미가 내린 결론이다. 몇십 년을 함께 살며 누구보다도 도로시아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지만, 그녀를 다른 누군가에게 오롯이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은 모종의 법칙에 매여 있다. 모든 종속적 삶을 거부하고자 하는 애비마저도 자신이 세운 가장 본질적인 삶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이 배척하고자 하는 그 모든 인습에 대해 가장 자유로우면서도 확고한 원칙을 세우고 평생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도로시아와 제이미, 줄리와 윌리엄,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삶 한가운데 표류했지만 그 삶을 지배하는 모종의 법칙에서 한 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 당혹스럽도록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에 매 순간 그토록 충실할 수 있는 것은, 중력처럼 단단한 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날 방법을 어느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과 타인을 구속하고, 서로를 구속하는 이 관계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20세기>는 이처럼 구속되는 관계들의 아름다움을 매우 섬세하면서도 솔직한 문법으로 그려낸 좋은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