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 볼프, <거룩한 질서(The Divine Order)>, 2017
* 스포일러 : 강함
1971년 스위스의 어느 시골 마을, 출근하는 남편과 등교하는 두 아들을 입맞춤으로 배웅한 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노라(마리 루엔베르게르Marie Leuenberger)는 분명 행복하다. 익숙한 일상 속에서 가정은 화목하고, 마을은 평온하며, 사회의 질서는 안정적이다. 모든 사람이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오늘을 살고, 오늘을 대하는 자세로 다가올 내일을 맞는다면 이 평화로운 마을에 다툼은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제재소에서 일하는 한스에게 승진의 기회가 찾아온다. 한스는 노라의 남편이다. 구조조정의 위기에 놓인 제재소에서 뜻밖에도 승진의 기회를 잡은 한스에게 은밀한 조건이 따라붙는다. 다가오는 국민투표에서 여성 참정권이 부결되도록 노동자 여론을 조직하는 것. 보수적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시골 마을의 정서를 고려하면 그리 까다로울 것도 없는 제안이다. 한스는 그날 밤 가족과 함께 승진의 축배를 든다.
한스가 승진을 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노라에게는 다소 결이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아버지가 마실 찻물을 끓이던 중 신문에서 한 여행사의 구인광고를 발견한 노라는, 이 회사의 면접에 지원하고 싶은 뜻을 내비치지만 한스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내가 일을 하며 보람을 찾는 것보다 가장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아내의 경제활동이 자신의 무능으로 비칠 것을 우려하는 한스는 끝내 아내의 구직활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편 한스의 형 베르너와 그의 아내 테레즈에겐 어리고 아름다운 딸 한나가 있다. 한나는 마을의 여러 남자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유치하고 불쾌한 소문의 당사자가 되었고, 이로 인해 며칠째 집안에 갇혀 지내는 중이다. 평소 한나와 친밀한 사이인 노라는 테레즈에게 허락을 구한 뒤 한나를 교제 중인 남자 친구에게 데려간다. 그러나 부모의 뜻을 따라 이별을 통보하게 하려 했던 노라의 의도와 달리, 한나는 마중 나온 남자 친구의 오토바이를 타고 취리히로 달아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재가 파악된 한나는 부모의 동의에 의해 청소년 보호 수용소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마저 탈출을 시도하다 교도소에 수감되고 만다. 남자였다면 별 문제 아니었을 한나의 행동들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수치스러운 범죄로까지 취급되는 것을 보며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낀 노라는 마을 부녀회에서 여성 참정권에 찬성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중요한 동료 브로니를 만난다.
브로니는 오래전부터(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1959년부터)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노라가 어렴풋이나마 느껴왔던 많은 문제들도 브로니의 경험과 연륜 속에서 보다 명료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거들고 치우는 일, 시아버지의 잠자리를 정돈하다 발견한 성인잡지를 못 본 체 하는 일, 자신의 직업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일, 편견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성차별적 규범을 따르는 일, 여자들의 법적 권리를 집안의 남성 가장이 갖는 일, 그밖에 인생을 통틀어 자신의 삶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일들이 모두 일그러진 사회의 단면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당혹스러울 정도로 기세 등등한 그 일그러짐이 사회를 지배하는 '거룩한 질서'의 수호를 받으며 견고함을 더해나가고 있다는 것까지도. 이제 노라는 그 일그러짐 한가운데로 들어가 균열을 일으키기로 마음먹는다.
브로니와 함께 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노라는 브로니가 예전에 운영하던 가게에 들러 그곳 주인 그라젤라를 만난다. 매혹적인 그라젤라를 따라 미용실에 가서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새로 산 옷을 입은 채 거울 앞에 선 노라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 장면 이후의 노라는 이전의 모습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다. 가정 속 주어진 역할에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노라에 비해 자신의 권리를 분명히 자각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노라의 모습은 분명 도발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여성의 권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노라는 마을 사람들에게 여성 참정권의 필요성을 알리는 연설을 맡기로 한다.
그러던 와중에 노라는 테레즈가 남편 베르너에게 폭행당한 흔적을 발견한다. 교도소에 갇힌 딸 한나를 구하기 위해 남편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한 것. 이 일을 계기로, 그동안 가부장제 사회에 충실히 종사해온 테레즈도 노라와 함께 왜곡된 세상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노라와 테레즈, 브로니는 그동안 몰랐던(혹은 애써 모른 체 해야 했던) '여성'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한 여성학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들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과업을 맞닥뜨린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성기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함으로써 '여성을 직면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억압하도록 교육받아온 여성들이, 좁은 방 안에서 각자의 거울을 이용해 자신의 성기를 확인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자아를 속박하던 자기검열에서 해방되어 자신이 진정 어떤 모습인지를 확인하고 기뻐하는 노라를 보며, 관객들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이것은 지난 역사에만 적용되지 않으며, 시시각각 갖가지 이유로 구속되는 자아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가 충분히 건전하며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음을 매 순간 스스로 확인하고, 또한 타인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욕구는 감히 드러내서는 안 되는 불경스러운 것이므로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저 배척당한다. 이 영화에서는 이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욕구를 좁은 방안에서 공유하는 자칫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해냄으로써, 인간의 욕구가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그것은 교양과 품위를 규정하는 기득권을 적극적으로 비웃는 발칙한 행위를 반드시 포함한다. 비장하고 근엄한 상대와 맞서 싸울 때, 약자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풍자와 해학이기 때문이다. 기득권 체제에 순응하며 이루어낼 수 있는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 앞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역설하는 노라에게 쏟아지는 조롱과 비난은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수구적 성관념에 맞서는 여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합리적 대화나 반론이 아니다. 기득권은 변화를 외치는 소수의 목소리를 철저히 희화하고 주변화한다. 이들의 폭력성에 대응하여 파업을 선택한 주부들이 끝내 남자들의 물리적 강제력에 의해 원래의 자리로 무기력하게 돌아가는 모습은, 한 사회의 기득권 체제가 얼마나 견고하게 작동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룩한 질서>는 이렇게 단단한 사회의 룰을 바꾸어가는 작업을, 그 지난하고도 어려운 과정을 압축적이고도 상징적으로 묘사한 영화이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 시대를 앞서갈 수 없지만, 또한 변화하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도 없다. 소수의 목소리와 약자의 저항은 곧 역사를 가로지르는 도도한 흐름이 되고, 치열한 싸움 뒤엔 일상으로 녹아들어가 개인의 권리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갖는 권리는 지난날 치열하게 싸운 누군가가 남긴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소리 높여 쟁취하고자 하는 가치는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숨 쉬듯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거룩한 질서' 속 평화로운 공동체보다 권리를 위해 싸우는 개인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자유로운 인간의 가치를 우리 모두가 깊이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