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Dec 18. 2022

이토록 서정적인 동화의 세계

정재은, 『내 여자 친구의 다리』, 창비, 2018

* 쪽수: 132



최근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소속 작가 20명이 참여한 SF 앤솔러지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2022)가 출간되었습니다. 한국의 대표 문예지라고 할 수 있는 월간 《현대문학》 7월호와 8월호에 각각 열 편씩 실렸던 작품을 한 권에 모은 것인데, 이전까지는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에서나 했을 법한 기획이어서 새삼 놀랐습니다. 제 일상 경험에 비추어보면 아직도 SF를 주변부로 인식하는 기류가 꽤 남아있는 듯한데, 정작 업계에서 실감하는 독자 동향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차곡차곡 변화하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서두에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를 언급한 이유는 물론 이 책 속에 훌륭한 작품들이 여럿 실려 있기 때문이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정재은의 단편 「너의 노래를 듣고 싶어」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성간 비행 중인 우주선 안에서 주인공의 독백으로 전개되는 굉장히 서정적인 작품이지요. 짧은 분량 안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인한 행성 이민의 모티프와 소수자 정체성, 난민과 장애인에 관한 사회적인 메시지까지 두루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작가 특유의 동화적인 색채와 발상이 곳곳에 묻어있어서, 역시 청소년 독자에게 권하기에 아쉬움이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소개할 『내 여자 친구의 다리』 또한 작가의 색채가 뚜렷이 반영되어 있는 책입니다. 2018년에 출간된 정재은의 첫 동화집이고요. 국내에 정말 흔치 않은, SF 동화로만 구성된 단편집입니다. 2005년 과학기술 창작문예 아동문학부문 당선작 「아바타 학교」가 실려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지요. 실린 작품은 총 여섯 편이고, 각각의 제목은 「아바타 학교」, 「내 여자 친구의 다리」, 「뚜다의 첫 경험」, 「이 멋진 자연」, 「하늘, 구름, 떡볶이」, 「똥 실명제」입니다. 한 작품씩 간단히 요약하여 소개해 보겠습니다.


작가는 꾸준히 장애에 관해 말합니다. 「너의 노래를 듣고 싶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요. 첫 작품 「아바타 학교」는 제목 그대로 학생이 홀로그램 아바타를 이용하여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바타를 조작하는 동안 진짜 몸은 집에 있죠. 그러다 보니 아바타 성형이 유행하게 됩니다. 이 세계에서 아바타는 원래 몸의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지긴 하지만, 아바타 성형으로 조금씩 꾸미거나 바꾸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주인공 '은은'은 성형으로 잘 꾸미고 다니는 '나리'를 보며 진짜 몸과 아바타의 생김새가 점점 달라지고 있다면서 냉소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전학 온 '다영'은 그런 은은의 메시지를 차단하죠. 초조해진 은은이 무작정 다영의 집을 찾아가서 보게 되는 광경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말을 더듬는 다영의 모습입니다. 다영의 아바타만 봤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습이지요. 은은의 가치관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까요.


장애를 중심 소재로 다루는 서사는 「내 여자 친구의 다리」와 「하늘, 구름, 떡볶이」에서도 담담하게 이어집니다. 「내 여자 친구의 다리」는 교통사고 이후 인조 다리를 얻게 된 '연이'의 발레 이야기입니다. 아홉 살 때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연이는 지능형 보조 다리를 착용하고 6년 만에 '프리마 발레리나 월드 오디션'에 나갈 정도로 탁월한 발레리나가 됩니다. 물론 피나는 노력 끝에 얻은 성과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연이를 향해 갖은 비판을 쏟아냅니다. 발달한 기술에 힘입어 발레 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연이'의 단짝 '리오'에 의해 관찰, 서술되며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지요.


「하늘, 구름, 떡볶이」는 바닷속 도시가 배경입니다. 주인공 '유주'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늘을 본 적 없고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형'이라 불리는 아이가 유주에게 바다의 위쪽 끝에서 물밖으로 나가면 머리 위에 하늘이 펼쳐져 있다고 말해줍니다. 형의 말에 따르면 물 밖은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가끔 눈비가 내리고 맛있는 떡볶이도 먹을 수 있는 신비로운 곳입니다. 형은 휠체어에 앉아 있고, 다소 무기력해 보이는데, 바다 밖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왠지 다른 사람 같아 보이지요.


「뚜다의 첫 경험」은 이 책에서 가장 발랄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뚜다'는 지구를 탐사 중인 외계 로봇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뚜다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감각은 다름 아닌 사랑이고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이성 간 사랑이라기보다는 한 개체가 다른 개체를 향해 품는 무조건적인 사랑, 즉 아가페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가페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입니다. 뚜다는 장수풍뎅이 한 마리를 선택해 지구에 대한 생물의 체험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장수풍뎅이는 '종현'의 집에서 길러지며 인간 가족에 대한 정보, 특히 그들 사이에 오가는 감정에 관한 생경한 정보들을 뚜다에게 전송하지요.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주 기발하고 아기자기하면서 한편으로 애틋한 정서를 자아냅니다.


「이 멋진 자연」은 개발로 황폐화된 지구에서 더 이상 자연의 싱그러움을 경험할 수 없게 되자, 가상현실 안에서 정원을 조성하여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 상용화된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유민'과 유민의 엄마, 가상 정원 개발자 아저씨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요. 자연이 갖는 자연스러움까지도 인위적으로 연출해내고자 하는 어떤 인간들의 욕망을, 우리 시대 평범한 소비자의 언어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이 이야기는 기후 위기로 인한 지구적 문제를 오로지 자본의 논리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똥 실명제」는 제각각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학교에 다니는 지구인의 별명은 '똥이'입니다. 똥을 싸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어느 날 똥이가 교실에 들어오며 큰 소리로 정화실(화장실)마다 똥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학교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이내 '똥 실명제'를 발표합니다. 알다시피 어린이의 세계에서 똥과 웃음은 거의 반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호관계를 갖습니다. 정체불명의 똥 사건으로 학교가 발칵 뒤집힌 상황에서조차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들썩이는 '똥이'의 모습은 그런 어린이의 모습을 맑게 투영하고 있지요.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알아갈 권리를 행사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