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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Dec 24. 2022

옛이야기 속 숨은 인물 찾기

천효정, 『삼백이의 칠일장』, 문학동네, 2014

* 쪽수: 232



제14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천효정의 『삼백이의 칠일장』은 원래 두 권으로 나뉘어 출간된 작품인데 올해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으로 232쪽짜리 합본 특별판이 나왔습니다. 유년 동화치고는 제법 묵직하지요. 기존에 분권을 해야 했던 이유도 저학년 독자를 겨냥해 쓰인 책으로서는 다소 두꺼웠기 때문인데, 이제는 작품이 어느 정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런 요인을 좀 덜 고려할 수 있게 된 겁니다.


합본이 출간되면서 '삼백이의 칠일장'이라는 제목도 더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각 권의 부제가 책 표지에 큰 글씨로 적혀 있었거든요. 1권의 부제는 '얘야, 아무개야, 거시기야!'이고, 2권의 부제는 '삼백이는 모르는 삼백이 이야기'입니다. 각 권의 표지 디자인은 이렇습니다.



각 권의 부제도 물론 나쁘지 않은 제목이지만 다 읽고 나면 좀 아쉽게 느껴지는데, 그건 '삼백이의 칠일장'이 너무 좋은 제목이기 때문이에요. 이 이야기는 이름이 없어 저승사자의 생사부에 오르지 않아 삼백 년이나 살았던 한 인물의 장례식 이야기거든요. '삼백이의 칠일장'이란 제목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압축하여 전달하는 수단으로서도 아주 훌륭하지요. 합본에서는 무엇보다 그 제목이 잘 보여서 좋았습니다.



이 작품이 지닌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화자의 스토리텔링이 옛이야기의 구술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옛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아주 천연덕스럽고 뻔뻔하면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지요. 프롤로그는 어느 이름 없는 아이가 저승사자를 피해 삼백 년이나 살다가 마침내 죽게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이미 하나의 재미있는 옛이야기가 완성되지만,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그다음부터 이어집니다.


삼백이가 죽고 난 뒤 열린 장례식에 동물 귀신 여섯 마리가 찾아와 상주를 맡습니다. 구렁이, 개, 소, 까치, 호랑이, 말이 각각 하룻밤씩을 맡아 삼백이와의 인연이 얽힌 사연을 들려주지요. 왠지 허풍이 섞인 것도 같고 오랜 교훈을 담고 있는 것도 같은 이들의 사연은 옛이야기의 외피를 빌려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당연히 모든 사연에 삼백이가 등장하지만 비중이 카메오 수준이라 독자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저승사자를 피해 삼백 년을 숨어 다닌 인물이 각각의 사연 속 꼭 숨어있는 설정은 아주 자연스럽고 그만큼 흥미롭습니다. 어쨌거나 동물 귀신들과 삼백이를 잇는 인연의 끈은 실오라기처럼 가늘고, 그래서 더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렇게 여섯 개의 이야기와 함께 여섯 밤이 지나고, 일곱째 날 삼백이의 묘 앞에서 이야기는 끝이 나지요.


삽화가 굉장히 풍부하게 담겨 있는 책입니다. 장마다 크고 작은 삽화가 들어있기 때문에 232쪽의 분량과 두께가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아요. 이야기의 줄거리와 스토리텔링 식, 익살스러운 삽화의 세 요소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한 번 펴면 그 자리에서 끝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에피소드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 편씩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 또한 이 책이 유년 동화로서 갖는 큰 장점이지요.


이 작품의 특징적인 매력은 주인공의 독특한 포지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백이는 제목을 장식할 만큼 이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지만 각각의 에피소드 안에서는 철저히 파편화되어 서사의 주변부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인공이라고 말하기가 무색할 정도지요. 그럼에도 삼백이가 무심하게 던졌던 말과 행동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다른 이의 삶에 행복을 보태어 줍니다. 평생 죽지 않는 것 말고는 어느 것에도 관심 없어 보였던 삼백이도 알고 보면 삶의 곳곳에서 다른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신기한 것은 이 책에서 삼백이는 몇 번 나오지도 않는데 독자는 다 읽고 나서 그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삼백 살 먹은 노인임에도 마냥 천진난만하고 장난기 많은 어린이로만 느껴지는 삼백이의 모습은 이 작품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려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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