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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Dec 29. 2022

작은 생명을 향한 연대의 희망

은경, 『애니캔』, 별숲, 2022

* 쪽수: 172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개와 함께 산다는 건 제때 밥을 챙겨주고, 시간 내서 예뻐해 주고, 하루 두세 번 산책을 하고, 뒤처리를 하고, 씻기고, 때마다 미용이나 예방접종을 하고,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잘못했을 땐 적당히 타이르고, 그렇게 매일 부대끼며 지낸다는 뜻일 겁니다. 이런 일들은 반려동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지 않고, 누가 대신해주지도 않습니다. 힘들어도 보호자가 직접 하고, 책임도 직접 져야 하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랑은 분명 책임감과 관련 있습니다. 요컨대 내가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기꺼이 도맡아 할 수 있는가 중요하겠죠.


그런데 늙지 않고, 아프지 않고, 애교 많고, 깨끗하고, 영리하고, 배설하지 않고, 털이 빠지지 않고, 냄새가 나지 않고, 산책 가자고 조르지 않고, 종일 혼자 있어도 슬퍼하거나 외로워하지 않는 개가 있다면 어떨까요. (그런 개가 반드시 이상적인 개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예를 든 것뿐이지요.) 모든 반려동물이 주인의 성향에 꼭 맞는 기질을 선택적으로 갖게 된다면, 혹은 그렇게 맞춤 설계할 수 있는 생물학적 기술이 개발된다면요. 별다른 책임감 없이도 한 생명을 품에 안을 수 있다면 세계의 풍경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은경의 장편동화 『애니캔』은 그런 '맞춤형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반려동물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기업 '애니캔'은 갓 어미젖을 뗀 새끼를 동면에 들게 한 뒤 영양액이 든 통조림 캔에 넣어 두었다가 원하는 주인이 나타나면 판매합니다. 판매된 반려동물은 이후 애니캔이 제공하는 특별식 사료만 먹어야 합니다. 다른 걸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건 이 이야기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시스템 상의 결함이지요. 알고 보니 이 맞춤형 반려동물 기술은 그다지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겁니다. 이해할 만한 설정이지만 조금 의외였어요. 전 이 작품이 기술적으로 완전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공허한 역설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 넘겨짚었거든요.


주인공 '정새롬'은 친구에게 선물 받은 애니캔 추첨권으로 강아지를 뽑습니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채로 캔에서 꺼내어지는 강아지를 보고 찜찜한 기분이 들긴 지만, 당장은 그토록 원하던 강아지를 갖게 되었다는 기쁨이 훨씬 크게 다가오지요. 새롬이는 강아지의 이름을 '별이'라 짓고 애지중지하며 키웁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별이는 애니캔 사료 대신 다른 음식을 먹고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가려져 있던 세계의 어두운 이면이 새롬이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지요.


이곳의 어른들은 좀처럼 어린이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애니캔의 대표 '러비 킴'부터 새롬이의 부모님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그들은 어린이를 위한다는 말을 명분 삼아 어린이를 속이고, 기만하고, 현상 이면의 진실을 은폐합니다. 동화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이만큼 적대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은 최근에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유효한 측면이 있고 드물게는 이런 '어른 대 어린이'의 구도 위에서만 가능해지는 내러티브도 여전히 존재하지요. '애니캔'과 같은 회사가 버젓이 굴러가는 삭막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린이의 연대는 그야말로 필연적인 사건입니다.


어린이들의 연대의식에 불을 댕긴 기폭제는 물론 별이의 아픔입니다. 새롬이는 '꼭 별을 수호하리! 꼭별수'라는 이름의 브이로그 채널을 개설하고 별이의 아픔에 관한 진실을 알려 친구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알다시피 요즘은 이게 현실적으로도 전혀 불가능하지 않지요. 진심을 실은 날갯짓이 다른 이의 마음을 움직여 궁극적으로 세상을 더 살만한 곳으로 바꾸어내는 것, 저는 어린이 독자들이 이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그런 희망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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