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Jan 07. 2023

두 피노키오 이야기

카를로 콜로디, 『피노키오Pinocchio』, 더스토리, 2021

* 쪽수: 260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2022)가 개봉했습니다.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극도로 촘촘하게 짜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입니다. 이 작품에서 프레임 이미지를 구성하는 대상은 일러스트가 아니라 실물입니다. 보면서 '피노키오'라는 캐릭터에 특히 잘 어울리는 연출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쇼트와 쇼트를 가르는 미세한 틈 사이로 조금씩 삐그덕거리는 피노키오의 세계는 낯설고, 이질적이고, 그만큼 환상적이지요.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의 전작들을 유심히 본 관객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정도로, 이 작품에는 감독만의 고유한 색깔이 많이 묻어 있습니다. 이 작품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만든 <피노키오>가 아니라,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죠.


이번 기회에 원작 『피노키오』를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1883년에 처음 책으로 출간된 『피노키오』의 원제는 『피노키오의 모험, 꼭두각시 이야기Le avventure di Pinocchio, Storia di un burattino』입니다. 1881-1882년에 로마 지역 어린이 신문에 총 36회차로 연재되었던 작품을 책으로 묶은 것이고요. 사실 이야기는 15회에서 한 번 끝이 났었습니다. 두 강도가 나무에 피노키오의 목을 매달아 죽이는 결말이었죠. 의아하다 싶을 정도로 엉성하고 잔혹한 결말인데, 그렇게 된 데에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카를로 콜로디―본명은 카를로 로렌치니입니다―가 신문사로부터 약속된 원고료를 지급받지 못하자 홧김에 주인공을 죽여버린 겁니다. 이후 독자의 항의가 빗발치면서 신문사가 밀린 원고료를 지급했고, 작가가 죽은 피노키오를 다시 살려내어 36회까지 완성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피노키오』 이야기인 것이죠.


피노키오 하면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할 때 코가 길어지는 나무 인형의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겁니다. 그런데 피노키오의 코가 길어지는 장면은 원작을 통틀어 네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중에 두 번은 거짓말과 관계가 없고요. 그러니까 이건 아주 단편적인 설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피노키오에서 그보다 중요한 캐릭터는 장난기 많고 낙천적인 성격과 세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시각이고, 실은 그것이 원작 『피노키오』를 끌고 가는 핵심동력입니다. 하지만 코가 길어지는 것만큼 가시적인 장치는 아니다 보니 독자의 뇌리에는 조금 다른 이미지로 각인되어버린 것이죠. 그러니 이 글에서만이라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피노키오는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역시 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기는 하지만, 그 코에는 새 가지와 새 잎이 돋아나고 솔방울이 피어납니다. 피노키오의 거짓말이 역설적으로 새 생명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상징적 장치는 영화의 후반부에 피노키오 일행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피노키오가 이유 없이 거짓말을 일삼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꿰뚫어 본 명장면입니다.


제페토 캐릭터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어가 볼 수 있습니다. 원작에서 제페토는 특별한 결함을 지니지 않은 인물입니다. 처음 피노키오를 만들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해프닝을 겪긴 하지만, 그래도 제페토는 여전히 천사 같은 할아버지입니다. 반면 영화 속 제페토에게는 도입부부터 뚜렷한 결함이 주어집니다. 바로 아들 카를로의 죽음이죠. 원작에는 없는 인물입니다. 카를로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동경하는 소년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근방을 지나가던 전투기가 별생각 없이 투하한 폭탄에 맞아 죽게 됩니다. 선망의 대상으로서의 비행기와 임의로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 사이의 괴리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이죠. 절망에 빠진 제페토는 광기에 사로잡힌 채 피노키오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제 의지와 관계없이 세상에 태어난 피노키오는 어쩌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세상을 저주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향해 티 없이 해맑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영화는 반전에 관한 메시지를 시작부터 역설적으로 제시합니다.


한편 이 영화는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솔방울로 시작해서 떨어지는 솔방울로 끝나는데, 실은 이것이 이 영화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암시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노키오는 이탈리아어로 '솔방울'을 뜻하거든요.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페토는 비늘이 빠진 솔방울을 보며 온전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예쁘고 둥근 솔방울만 가치가 있다는 듯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피노키오의 성장과 함께 조금씩 힘을 잃어갑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영화 속 피노키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완전한 존재이니까요. 즉 이 영화는 피노키오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오롯이 수용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원작의 메시지와는 조금 온도차가 나지요. '주인공이 자아를 찾는 여정'이라는 넓은 틀에서는 비슷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무심한 얘기입니다. 이 작품은 좀 더 관심을 기울여 볼 가치가 있습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결말입니다. 알다시피 원작에서는 피노키오가 인간 소년으로 거듭나면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그런데 21세기의 독자와 관객은 인간이 그 정도로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이미 여러 측면에서 인식하고 있습니다.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가 날로 활기를 더해가는 지금, 이야기 속 불완전했던 존재가 완전함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이 된다는 결말은 이상합니다. 그보다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남아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를 찾아야 더 말이 되는 시대지요. 그런 점에서 영화의 결말은 우리가 사는 시대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제페토는 피노키오가 죽은 아들 카를로와 같아지거나 최소한 비슷하게 행동하기를 바라고, 피노키오 역시 주변 인간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제 삶의 첫 경험들을 채워가지만, 뒤로 갈수록 상황은 역전됩니다. 피노키오는 자신이 카를로가 아니라고 항변하며 자기만의 정체성을 획득해 냅니다. 제페토 역시 결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피노키오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요.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전개입니다. 피노키오가 인간이 되는 원작의 방식으로는 이 정도의 감동을 연출해내기 어려웠겠죠. 중요한 것은 그럴싸해 보이는 단편적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하는 것입니다.


원작의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교훈이 영화에서 대부분 해체된 것 또한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원작이 일차원적 교훈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좀 답답하긴 하거든요.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어린이의 해맑음에 기대어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서사잖아요. 그런데 중간중간 '아빠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식의 판에 박힌 기성세대의 교훈이 반복되면 긴장감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어요. 영화는 그것을 표층 아래로 묻어둠으로써 이야기와 캐릭터가 지닌 매력을 한껏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걸 아주 재치 있게 표현한 장면이 있습니다. 말하는 귀뚜라미, 세바스티안 J. 크리켓의 잔소리를 피노키오가 박차고 나가는 장면인데, 틈만 나면 교훈을 찾아 설명하려 드는 어른들에게 '아직은 네가 나설 때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지요.)


한편 원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악당은 여우와 고양이로 이루어진 2인조 강도입니다. 피노키오를 나무에 목매달아 죽인 범인들이죠. 그밖에 만자후오코라는 그리 악랄하지 않은 인형극 단장도 있고, 피노키오를 유혹에 빠뜨리는 친구도 있고, 바닷속 거대상어와 같은 괴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조금 약해요. 영화에서는 보통 서사 전체를 지배하는 악역이 하나 이상 필요한데, 원작의 어느 악당도 그 정도로 존재감이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새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영화에서 새롭게 탄생한 메인 빌런이 바로 극단 단장인 볼페 백작입니다. 볼페가 이탈리아어로 '여우'라는 뜻이니, 원작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악당의 캐릭터 일부를 참고하여 변형한 것으로 보아야겠죠. 실제로 하는 행동도 닮았습니다. 원작의 여우와 영화 속 볼페 백작은 둘 다 피노키오의 진심을 이용해 자기네 잇속을 채우는 비열한 사기꾼이에요.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변형은 서브 빌런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피노키오와 제페토가 사는 마을의 시장인 포데스타는 열렬한 파시즘 신봉자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비장하고 엄숙하죠. 이런 엄숙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언제나 풍자와 해학입니다. 여기서 그걸 가장 잘하는 인물은 당연히 피노키오고요. 영화의 후반부에는 이탈리아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무솔리니도 잠깐 나오는데, 그의 등장부터 퇴장까지 모든 요소가 엄숙주의에 대한 철저한 조롱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전체주의에 찌든 정치인에 대해 영화가 지닌 견해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죠. 이건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기발하고 통쾌합니다. 피노키오를 가지고 이런 풍자극을 꾸며낼 줄 누가 예상이나 했던가요.


캔들윅이라는 어린이 악당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원작에 나오는 로메오라는 친구의 변형인데 이 로메오의 별명이 양초 심지, 즉 캔들윅이거든요. 원작에서는 장난감 마을에 가자고 피노키오를 꼬드기는 인물로 나옵니다. 그리고 결말에선 당나귀의 모습을 한 채 허무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지요. 그 정도로 잘못한 건 없는데 말이에요. 오래된 이야기 속에선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어쨌거나 이 캔들윅이 영화에서는 포데스타 시장의 아들이자 어린 파시스트로 나옵니다. 하지만 포데스타 시장과 달리 캔들윅은 개선의 여지가 있지요. 어린이니까요. 영화 속 캔들윅은 피노키오의 영향으로 본래의 맑고 선한 성품을 회복합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적을 죽이는 일에 어린이까지 동원하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순수한 가치를 역설합니다.


이렇듯 많은 것이 달라지긴 했지만 영화는 피노키오의 시그니처라고 할 만한 독창적인 모티프도 곳곳에 심어두었습니다. 말하는 귀뚜라미와 피노키오가 옥신각신 다투는 장면, 피노키오의 나무 발이 불에 타버려서 제페토가 새 다리를 만들어주는 장면, 피노키오가 제페토에게 받은 교과서를 첫날부터 잃어버리고 마는 장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피노키오가 파란 요정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죽은 이를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관을 든 토끼 네 마리, 거대 바다괴물의 뱃속에서 제페토와 피노키오가 재회하는 장면 등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들도 감독의 방식으로 제가끔 알맞게 변주가 되어 있죠.


개중 가장 의미심장한 변주는 삶을 바라보는 피노키오의 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의 피노키오가 인간이 되기만을 무조건적으로 갈망하는 존재였다면, 영화 속 피노키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내는 존재입니다. 영화의 전반부에 피노키오는 전쟁을 대리 체험하는 객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는 그가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수월해지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는 피노키오 역시 한 번뿐인 삶을 사는 유한한 존재가 됩니다. 단순하게 '인간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고민이 따르는 설정이지요. 삶의 끝에 아득한 죽음이 찾아온다면, 또는 삶과 죽음이 하나의 선 위에 연속적으로 놓여있는 무엇이라면, 과연 나는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들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피노키오는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둘 떠나보내며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피노키오가 떠난 자리에 남아있던 관객들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생명을 향한 연대의 희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