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Jan 20. 2023

단편동화를 읽는 이유

김태호, 『제후의 선택』, 문학동네, 2016

* 쪽수: 172쪽



김태호의 단편동화집 『제후의 선택』은 모두 아홉 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제법 볼륨감 있는 동화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전 단편동화를 읽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때마다 책장에서 단편집을 꺼내 들게 되는 건 짧은 이야기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전 그 매력이, 하나의 발상이 한 작품의 주제로 발전해 가는 과정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훌륭한 단편집은 반짝이는 발상으로 가득한 보물상자와 같습니다.


동화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제후의 선택』에서 송미경의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거예요. 진부한 표현이지만 송미경의 단편에는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힘이 있는데, 『제후의 선택』에 실린 작품들도 정확히 그렇거든요. 준비되지 않은 채 어딘가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랄까요. 오늘은 이 작품들이 어째서 그런 느낌을 주는지 가볍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모든 작품에 일일이 코멘트를 다는 건 너무 기계적인 것 같아서, 저에게 특히 재미있게 느껴졌던 작품들 몇 편을 골라 짤막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남주부전」과 「나목이」는 한 마디로 '아재개그의 동화적 구현'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법한 작품입니다. 아재개그의 헐렁한 묘미가 몇 가지 동화적 장치에 힘입어 아주 간결하면서도 신선한 스토리라인을 완성해 내지요. 각 작품이 건네는 농담은 인물의 대사 안에만 머물지 않고, 이야기의 안팎을 넘나들며 일관된 주제의식을 형성합니다. 특히 「남주부전」은 '별주부전'의 현대적 패러디이면서, '주부'라는 말에 내재된 우리 사회의 차별적 문화 코드를 기발한 언어유희로 뒤집는 작품입니다. 짧은 분량을 언어적 곡예로 단단히 채우고 있고, 장르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이전의 동화에서 좀처럼 만나보지 못한 생소한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완성도 높은 이야기입니다.


표제작 「제후의 선택」은 쥐의 둔갑 설화를 패러디한 이야기입니다. 설화에서는 사람의 손톱을 먹은 들쥐가 그 사람으로 둔갑하여 진짜 행세를 하고, 가족들을 혼란에 빠뜨리지요. 설화 버전에서 중요한 것은 둘 중 진짜를 찾고 가짜를 폐기하는 선별 작업입니다. 그에 반해 「제후의 선택」은 초점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공 '제후'는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그늘 아래서 누구를 따라갈지 선택해야 합니다. 제후의 부모님은 답 없는 결정을 제후에게 미루며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하죠. 초조하고 불안해진 제후의 손톱은 자꾸만 짧아지고, 손톱 밑 살들도 빨갛게 부어오릅니다. 그 사이 잘린 손톱을 먹은 쥐들이 제후가 되어 집안에 들어옵니다. 이 맥락에서 어떤 제후가 진짜인지 밝혀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이 세계에 속한 어른들이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창 안의 아이들」은 지금에 와서는 좀 뻔한 이야기가 됐습니다. 여기서 창은 스마트폰 대화방을 뜻하고요. '연수'가 차에 치인 고양이를 목격하고 사진으로 찍어 올리자 창 안에 있던 친구들의 열띤 토론이 시작됩니다. 그러는 동안 다친 고양이는 점점 숨이 멎어 가지요. 안 되는 게 없다는 만능 기계를 하나씩 손에 쥐고도 끝내 소중한 것들을 지키지 못하는 어느 세계의 자화상이 쓸쓸하게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뻔해도 쉽게 지나칠 수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게임 중」은 읽고 나면 굉장히 강렬한 이미지가 마음 한 구석에 인장처럼 새겨지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사회라는 정교한 톱니바퀴에서 탈락한 어른들을 종종 중요한 인물로 등장시킵니다. '연석이 아빠'는 연석이의 친구들이 보기에 최고의 아빠입니다. 늘 새로운 게임기를 사주고, 함께 게임을 하며 놀아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째선지 연석이는 요즘 친구들을 멀리합니다. 그런 연석이네 집에 놀러 가 반나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그제야 연석이 아빠가 실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최고의 아빠로만 여겨졌던 연석이 아빠는 친구들에게 마치 '초등학생처럼 작아' 보이는 모습으로 초라하게 묘사되며 쓸쓸히 퇴장합니다.


강렬한 기억에 관한 이미지는 「구멍 난 손」에서도 이어집니다. 한 쇼핑센터에서 일어난 대형 사고로 형은 목숨을 잃었고, 남은 세 식구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형의 빈자리를 매 순간 의식하면서도 차마 인정할 수 없어 전과 같은 일상을 살아내는 세 사람의 모습이 못내 안쓰럽습니다. 비정한 현실 앞에서 각자만의 방식으로 소리 없는 분투를 이어가던 셋은, 구멍 난 손으로 은유되는 '나'의 트라우마를 계기로 서로의 슬픔을 확인한 뒤 다시금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복귀합니다. 먹먹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작품 「꽃지뢰」는 성간 전쟁을 묘사한 SF입니다. 전쟁의 끝은 공멸이고요. 수명이 다한 지구를 떠나려는 인간들에게 '아토 행성'은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습니다. 아토 행성을 발견한 인간들은 대단히 '지구인스러운' 방식으로 아토인과 협상을 시도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또다시 대단히 '지구인스러운' 방식으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갖는 가장 특징적인 매력은 역시, 근본적으로 지구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아득히 먼 곳에서 돌아보는 것과 같은 생경한 감각을 안겨준다는 점일 겁니다. 수많은 SF에서 지금도 수없이 묘사하는 그 감각에 따르자면, 지구인의 게으른 관성을 대폭 수정하지 않는 한 지구는 정말로 망해버릴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어쩌면 그건 생각보다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일 수도 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두 피노키오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