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아동문학평론》 2022년 겨울호에 실은 글입니다. '청소년 소설 읽기' 지면에 아래의 단편소설 다섯 작품을 짤막하게 소개해 보았습니다.
최영희, 「안녕, 베타」
고호관, 「하늘은 무섭지 않아」
윤여경, 「세 개의 시간」
문이소, 「마지막 히치하이커」
남유하, 「푸른 머리카락」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은 어린이·청소년 독자에게 얼마간 딱딱하게 들리는 모양이다. 과학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을 때 호의적인 반응이 돌아오는 경우가 드문 것을 보면 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대답은 과학소설이 과학 교과 학습을 돕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과학을 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된 정규 교과의 하나로 파악하는 데에 익숙한 그들은 과학과 소설의 만남을 그렇게 반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히 과학과 소설의 결합이든, 과학적 이론에 기반한 소설이든, 과학적 상상력을 토대로 한 소설이든, 그들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SF'라는 이름을 쓰면 상황은 적잖이 달라진다. 일단 반쯤 호기심 섞인 반응이 돌아온다. "SF, 나 그거 알아요."라거나, "SF? 그게 뭔데요?"라는 식이다. SF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고 하는 어린이들도 '마블 영화'나 '부산행' 하면 금세 얼굴에 반가운 빛이 떠오른다. 그리고 묻는다. "근데 그게 왜 SF예요?" 나는 통상 여기까지 오면 SF나 과학소설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본다.
난데없이 장르 분류에 영문 약칭을 쓰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접근 방식이다. 나는 'SF란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명료한 정의를 어지간해서는 믿지 않는다. 장르의 경계는 흐릿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SF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자주 언급되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와 2022 한국 SF 어워드 장편 부문 대상작인 최의택의 『슈뢰딩거의 아이들』(2021)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스펙트럼의 SF가 저마다의 평행우주로 존재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하나의 명제 안에 작품들을 욱여넣는 방식보다는, 거꾸로 개개의 작품을 통해 SF라는 거대한 코끼리를 더듬어 파악해가기를 주로 권장하는 편이다. 그렇게 파악된 SF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태로 존재하겠지만, 본디 사랑스러운 것들은 모두 조금씩은 부족하고 불완전하지 않던가.
다시 마블 영화와 <부산행>(2016) 이야기로 돌아오자. 납치된 동굴에서 초강력 슈트를 제작하는 공학자의 이야기나 반세기 동안 냉동상태로 보존되어 있다가 깨어난 초인의 이야기, 또는 범우주적 스케일의 악당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언가 '과학스러운' 요소들을 발견한다. '과학적'이라는 말 대신 '과학스럽다'라는 어색한 표현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들이 기초과학의 이론적 틀을 완전히 제멋대로 넘나들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SF 작품들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다. 원인 모를 좀비 바이러스의 창궐과 그로 인해 이성을 잃은 인간들에 관한 사고 실험도 마찬가지다. 좀비물은 물론 SF의 굵직한 하위 장르 중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다른 것에 비해 특별히 엄밀한 과학 이론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SF와 기초 과학의 조응 관계보다는 그동안 SF라는 장場에서 수없이 되풀이되어 온 창작자와 소비자의 관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글은 그러한 흐름 속에서 주요한 축을 이루며 일종의 하위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어린이·청소년 소비자층의 수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떻게 어린이·청소년 SF(또는 과학소설)의 성격을 논할 수 있을까. 나아가 이러한 장르의 실제 소비자라 할 수 있는 어린이·청소년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런 논의에 활용할 만한 훌륭한 자료가 있다. 어린이·청소년 과학소설의 선구자인 한낙원의 업적을 기려 2014년 제정된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작이 바로 그것이다.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매년 출간되고 있는 이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과학소설이 아우르는 대강의 범주뿐 아니라 한국 어린이·청소년 과학소설의 어떤 경향성까지도 짚어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회부터 5회까지의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작들을 통해 그러한 특징들 중 일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최영희의 「안녕, 베타」의 '베타'는 대체 인간이다. '을'이 있으면 '갑'이 있어야 하듯, '베타'가 있으면 '알파'도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알파에 해당하는 인물은 원인간 '진아'다. 대체 인간의 용도는 원인간이 하기 싫거나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대체 인간의 존재성은 명백히 원인간에 종속되어 있다. 그들의 존재론적 본질은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기술적 모방의 정교함에 있다. 원인간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원인간에 가까워질 것, 빈틈없이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비인간으로서 존재할 것. 이렇듯 대체 인간의 존재성에 내재한 아이러니는 이 작품의 핵심 모티프가 된다.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인간이 아닌 인물은 적어도 한 번은 오작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독자에게 존재론적 의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베타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스스로 사라지는 돌발 행동을 함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즉 진아를 대체하는 일을 가능한 한 가장 소극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려는 베타의 모습은 애초에 그를 설계한 인간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이 의외성이 역설적으로 베타에게 고유한 정체성과 함께 독자적인 서사의 자격을 부여한다.
결국 베타의 돌발 행동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비틀고 변형함으로써 스스로 존재 증명을 해내려는 저항의 과정으로 볼 수 있고, 실은 그것이 베타가 이 이야기 속에서 존재하는 진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독자는 「안녕, 베타」가 원인간과 대체 인간의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인간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고호관의 「하늘은 무섭지 않아」는 SF 장르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꽤나 반갑게 느껴질 작품이다. 이전 세대의 달나라 시민들이 독립 혁명을 일으켜 지구를 공격했다는 설정은 당연하게도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The Moon is a Harsh Mistress』(1966)을 연상시키는데, 구체적인 서사를 들여다보면 미 항공 우주국의 엔지니어 호머 히컴의 일화를 다룬 영화 <옥토버 스카이October Sky>(1999)도 떠오른다.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우주 전쟁'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한 소년의 짤막한 모험을 그렸다.
이곳에서 우주는 금기시되어 있다. 로켓을 연구하거나 발사하는 것은 물론 입에 담는 것조차도 위험하다. 우주를 선망하는 인간은 '우주쟁이'로 몰려 경찰에게 잡혀간다. 그래서 지구 사람들은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달을 쳐다보며 습관적으로 땅을 향해 침을 뱉는다. 그것은 지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일까, 두 발 단단히 묶인 처량한 신세에 대한 자조일까, 아니면 은폐되고 억압된 동경일까.
과거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어른들의 몫이다. 어른들의 끊임없는 세뇌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한 소년들의 열정은 자꾸만 우주로 향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형진'과 '재안'은 우연한 기회에 로켓에 대해 알게 되고, 그때부터 아지트에서 비밀리에 로켓을 쏘아 올릴 방법을 연구한다. 마침내 로켓이 발사되던 날에 일어나는 사건은, 결국 하늘이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지적 탐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암시하며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윤여경의 「세 개의 시간」은 개인의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작은 우주선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 흐름을 공유하는 당연한 물리법칙이 이곳에선 오히려 낯설게 여겨진다. 이처럼 인간이 바꿀 수 없다고 믿었던 삶의 고정된 조건을 천연덕스럽게 바꾸어내고는 그 위에서 일어날 일들을 상상해보는 것은 과학소설에서 가장 흔히 마주할 수 있는 광경이다. (이 지점에서 가장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는 한국의 SF 작가는 김보영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을 텐데, 그를 모르는 독자라도 2009년에 처음 발표된 단편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를 읽고 나면 아마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이 우주선에서 '채아'는 부모님과 0:1:18의 시간 비율로 살고 있다. 아빠가 시간이 멈춘 상태로 가수면에 들어가 있는 동안 엄마는 1년을 살고, 같은 기간 채아는 무려 18년을 고속으로 성장하게끔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채아의 눈에 보이는 엄마는 슬로비디오 속 등장인물처럼 느릿하고 아빠는 아예 멈춰있다. 왜 그래야만 할까. 사실 그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귀환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혜성 충돌로 척박해진 지구로 다시 돌아가 살려면 성인의 강한 면역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린 채아의 시간을 빠르게 돌린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지구에 돌아오는 날 채아는 스무 살이 된다. 그런데 채아는 정말 이렇게 성인이 되어도 괜찮은 걸까.
단절된 시간 속에서 각자 부유하던 우주선 내부에 작은 변수가 발생한다. 채아가 타임 리셋 프로그램을 발견한 것이다.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채아는 부모님과 같은 속도로 시간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미래의 생존을 위해 따로 흘러가던 시간이 가족을 단위로 하여 새롭게 맞추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한 공간 안에 있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던 관계의 갈증은, 세 사람의 시간이 마치 호흡처럼 일치하는 순간부터 조금씩 해소된다. 성장이라는 것이 몸의 자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성장을 이처럼 절묘하게 묘사하는 작품을 만나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문이소의 「마지막 히치하이커」는 버디 로드 무비의 형식을 따르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SF다. 황룡강가에서 발견된 휴머노이드 '몰리오'에서 출발하여 광주 유스퀘어 터미널을 거쳐 대전의 연구소로 향하는 여정이다. 중간중간 위기가 찾아오고, 나쁜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여정에 훼방을 놓는다. 주인공 '이보나'는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 선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몰리오를 목적지에 데려다주어야 한다. 흡사 모바일 게임의 미션 시나리오 같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가 취향에 맞는다면 분당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전삼혜의 「위치스 딜리버리」(2020), 부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듀나의 「대리전」(2005)과 같은 가까운 작품 위주로 장르를 탐색해보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마치 FPV 고글을 쓰고 게임 속에 구현된 현실의 거리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부산 해운대를 핵심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경희의 시간여행 SF 『그날, 그곳에서』(2021)와 같이 긴 호흡의 작품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잠깐 개인적 감상을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정말로, 끝내주게 재미있다.) 어린이·청소년 SF를 성인 SF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간주하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때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까지 부인할 이유는 없고, 그것이 꼭 부정적인 일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 장르에 대한 몇 개의 정의 안에 작품들을 일률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작품들을 대상 연령에 따라 나누는 것도 입체적인 해석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남유하의 「푸른 머리카락」은 눈에 띄게 이질적인 존재를 내세워 혐오와 차별, 그리고 화해에 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이질감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역으로 맹목적인 혐오와 편견의 동력으로 작용하기 쉽다. 이야기는 비교적 평범한 학교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다툼과 화해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듯 보이는데, 보다 깊이 들어가면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차별받는 타인과 정서적으로 연대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지유'는 전학 간 학교에서 자이밀 행성인의 후손 '재이'를 만난다. 자이밀리언들은 그들의 행성에 여성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지구에 왔다. 해수를 담수화하는 능력을 가진 그들은 지구의 여성과 결합하여 종족 번식을 하는 대가로 깊은 바닷속에서 죽을 때까지 수면을 취함으로써 지구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해주기로 했다. 이 대목에서 어떤 독자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유명한 단편 「블러드 차일드」(1995)를 떠올릴 것이고, 다른 독자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역작 『시녀 이야기』(1985)를 떠올리기도 할 텐데, 정작 이 작품의 톤과 뉘앙스는 거의 정반대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재이는 자이밀리언과 인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재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재이의 아버지가 지구의 바닷속에서 한평생을 잠으로 채우며 담수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타인의 희생을 딛고서만 피어날 수 있는 소중한 삶이지만 그런 재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그들이 보기에 자이밀리언과 그의 후손은 모두 지구에 기생하는 이방인일 뿐이다. 자이밀리언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재이는 학교에서 손쉽게 혐오의 객체가 되고 만다.
무엇이 혐오를 멈출 수 있을까. 이야기는 그 답을 바다에서 찾고 있다. 지유와 재이는 탁 트인 바다에서 서로에게 더 솔직해질 수 있고, 그만큼 서로를 믿을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학교는 차별과 혐오가 작동하는 공간이고 바다는 화해와 치유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우리의 현실도 언젠가는 바다처럼 자유로워질까.
과학소설이란 과학에 대한 경의를 품고 있는 소설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맞는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허전하다. 경험해본 바 과학소설이 과학보다 더한 경의를 품고 있는 대상은 언제나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과학은 그 세계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가닿도록 최적화된 경로일 뿐이다.
이 글에서 살펴본 작품들만 해도 그렇다. 이 다섯 작품들은 모두 청소년 주인공이 등장하고, 다분히 미래지향적이며, 고도로 진보한 과학기술의 빛과 그림자를 두루 조명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단편적인 공통점보다 이 작품들이 '과학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느슨하게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청소년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아도, 미래를 지향하지 않아도, 발달한 과학기술의 명암을 드러내지 않아도 같은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작품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몇 가지의 기준을 고수하기 위해 수많은 작품들을 장르 바깥으로 내팽개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이 또 있을까. 결국 과학소설이란 특정 규칙이나 과학 이론을 만족하는 작품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과학을 매개로 한 유희와 상상, 그리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경의로 느슨하게 묶이는 하나의 현상으로 파악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는 과학소설 장르문학이 앞으로 점점 더 어린이·청소년 독자의 기대에 활발히 부응해갈 것이라고 본다. 미지에 대한 탐구와 그로부터 오는 유희가 어린이·청소년 문학의 본령이라면 이들과 과학소설의 결합은 그야말로 필연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익히 마주하기 시작한 풍경이 그렇듯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과학소설이 뭐냐고 묻는 어린이·청소년 독자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자. 과학소설은 우주만큼 넓은 놀이터이며, 그 안에는 우리가 좋아할 만한 놀잇감이 적어도 한 개쯤은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