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과천에서 일하고 있었다. 과천 경마장 레츠런 파크에 벚꽃이 그렇게 유명하다며 같이 일하는 차장님이 함께 가자고 꼬신다. 차장님을 따라 밤에 갔다. 조명과 어우러진 벚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나는 벚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2016.
저가 항공사가 생기고 친한 회사 동료가 저가 항공사로 이직하면서 나는 저가 항공을 타고 근거리로 떠나는 해외여행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가격 부담 없고 거리 부담 없는 일본으로의 여행은 내게 주는 달콤한 휴식이자 직장 생활 속에서 기다려지는 즐거운 일탈이었다.
벚꽃을 본격적으로 사랑하기 시작한 난 벚꽃의 나라 일본에서 꼭 벚꽃을 봐야 할 것만 같았다. 또 이왕 볼 것이라면 그 벚꽃은 교토에서 보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져서, 4월 초 주말을 이용해 저가 항공을 타고 오로지 벚꽃을 위한 벚꽃여행을 다녀왔다.
교토를 가려면 오사카행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므로, 가장 먼저 본 것은 오사카성의 흐드러진 벚꽃이었다. 가족과 연인 단위로 벚꽃을 즐기러 나온 오사카 사람들의 모습과 매대에서 음식을 파는 상인들의 모습에 오사카 사람들의 일상 속 축제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교토로 향했다. 이곳은 벚꽃 축제의 장. 전 세계 사람들이 벚꽃을 보러 모인 것 같았다. 아라시야마, 헤이안 신궁, 철학의 길, 청수사(키요마즈테라)로 이어지는 고즈넉한 고도의 벚꽃이 모두 한 폭의 그림이었다. 꽃향기가 아닌 흙먼지 속에서도 느껴지는 꽃바람과 눈앞에 펼쳐지는 꽃비, 우연히 타게 된 열차에서 만난 벚꽃 터널, 사람이 많은 가운데서도 느껴지는 여유로움. 모든 것이 좋았다. 레츠런 파크와 같이 밤의 벚꽃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멋진 나이트 조명은 없었지만, 벚꽃과 벚꽃이 있는 교토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다. 최고의 벚꽃여행을 한 것만 같았다.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아쉬웠던 점(날씨 좋은 낮 동안의 벚꽃여행이 진리)을 보완하여, 내년에도 교토로 벚꽃여행 와야지,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2017.
전주에서 일하고 있었다. 전주엔 벚꽃 명소가 없는 듯했다.
2018.
여의도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새벽 2시에 벚꽃이 화려한 한적한 여의도 윤중로에서의 데이트를 꿈꿔왔지만 윤중로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때 처음으로 알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도 서먹하여 같이 가자고 하기는 쑥스럽고, 새벽 2시에 함께 걸어줄 남자친구도 없었지만, 윤중로가 회사와 아주 가깝다는 것을 안 이상 이대로 벚꽃 시즌을 보낼 수는 없었다.
퇴근을 하고, 남자친구와 오려고 했던 윤중로를 처음으로 나 홀로 걸었다. 그간 존재하지도 않았던 남자 친구 때문에 미뤄왔던 윤중로 벚꽃길 산책은 벚꽃과 함께하니 전혀 외롭지 않았다.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이렇게 오롯이 윤중로 벚꽃을 즐길 수 있었을까 싶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최악의 황사라고 하는 날에도, 나는 열심히 밤낮으로 윤중로를 걸었다. 윤중로에 또 언제 올지 모르니 여한이 없도록...
2019.
광화문에서 일하고 있었다. 덕수궁 근처에 가니 벚꽃이 보였다. 서촌을 가니 또 벚꽃이 보였다. 일에 치여서 벚꽃 시즌을 그냥 보내는 줄 알았다. 다행이다. 겨우내 웅크렸던 가슴을 활짝 편다. 발걸음은 점점 경쾌해진다.
2020.
코로나로 인해 재택을 하고 있었다. 오가며 보이는 길가의 벚꽃이 예쁘다. 코로나의 공포 때문인지 벚꽃 주변엔 사람이 없다. 벚꽃이 처음으로 외로워 보인다.
2021.
"주말엔 뭐하니?"
직장상사 눈에도 내 삶은 참 단조로워 보이나 보다.
"전 코로나 이후나 이전이나 주말이 다를 바가 없답니다~"
그렇다. 나는 해외여행을 갔던 것을 제외하고, 그 외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코로나 이전이나 이후나 동일하다. 코로나 이전에도 주말이라고 친구를 만난다거나, 맛집을 찾아다닌다거나, 국내여행을 떠난다거나 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직장상사가 말한다.
"어디 공원이라도 좀 다녀와보는 건 어때? 주위를 좀 봐봐. 이제 꽃이 피기 시작했어."
말도 섞기 싫은 사람이 이 말을 했다면, 주말은 당연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에서 보냈겠지만, 내가 잘 따르는 직장상사가 이런 말을 하니 숙제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주말은 작정을 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날이 너무 흐리다. 그렇게 주말을 날씨를 핑계로 다시 집에서 보냈다.
또 새로운 주말이 왔다. 이번 주는 어딘가에 벚꽃이 피었을 테니 반드시 어딘가를 다녀오겠다고 스스로 결심한다. 안타깝게도 토요일엔 추적추적 비가 온다. 집에만 있었다. 일요일이 됐다. 날은 갰다. 귀찮은 마음이 든다.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오후 느지막이 겨우 몸을 움직인다.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어디로 갈까? 일산 호수공원을 가보자. 벚꽃 시즌이니 벚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참 많았다. 작년과 달리 사람들은 코로나의 위험성은 잊은 것 같다.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거나 경치를 보려고 누워있는 사람도 꽤 된다.
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다가도 자꾸 멈춘다. 벚꽃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교토에서 찍은 벚꽃도, 윤중로에서 찍은 벚꽃도, 집 앞에서 찍은 벚꽃도, 다 멋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벚꽃은 그때 그 벚꽃들보다 더 멋있는 것 같다. 자전거를 누가 훔쳐가든 말든, 세워둔 자전거를 잊고 발걸음을 옮겨 더 멋있는 각도에서 벚꽃을 바라보려고 애쓴다. 왜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렇게 멋진 벚꽃 명소를 이제야 알게 된 걸까.
해외여행을 가면 항상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자전거다. 자고로 여행은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것. 걸으면서 멋진 광경을 보는 것은 좋은데 다리가 너무 아프다. 자전거로 저 앞에까지만 가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럼 더 빨리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자전거를 타고 벚꽃여행을 하고 있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소원을 이뤘다. 다리도 하나도 안 아프다.
마스크를 내리고 숨을 크게 쉬어본다. 공기가 정말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공기는 오랜만인 것 같다.
내년에 코로나가 종식되어 저가 항공을 타고 교토로 벚꽃여행을 갈 수 있다 해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일산 호수공원을 오겠다.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도 한 바퀴 돌고, 걸어서도 한 바퀴 돌고, 자전거를 타고도 한 바퀴를 돌겠다. 벚꽃 개화를 한 첫 주말에도 오고, 벚꽃 만개를 한 주말에도 오겠다. 벚꽃이 모두 지려고 하는 마지막 주말에도 오겠다. 밤에 조명이 있다면 밤에도 오겠다. 새벽에 일어날 수 있다면 새벽에도 오겠다. 누군가와 함께 올 수 있다면 그 누군가와도 두 번, 세 번이라도 오겠다.
교토 벚꽃여행 때도 이런 비슷한 내년도 계획을 세웠던 것 같은데...
그래도 내년을 한 번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