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2. 그의 "♡"은 진심이었을까
연수원 강사의 사소한 찝적임의 기억
연수원에서 단체로 받는 합숙교육을 질색하는 사람이 꽤 많다. 그런데 나는 그 합숙교육이 참 좋다.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교육이란 이름으로 일 아닌 다른 재미난 것들을 잔뜩 하기 때문이다. 교육 프로그램도 참 체계적이어서 만족스럽다.
내가 특히나 연수원을 좋아했던 것은 신입사원 합숙교육에서의 좋은 기억 때문이다. 신입도 아닌 경력 수시로 입사해서 같은 처지의 7살 많은 노땅 신입 대우를 제치고 교육을 가야 했던 상황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지만, 막상 신입 동생들, 친구들과 교육이란 이름으로 매일 24시간을 함께 지내며 나에 대해 알지 못했던 잠재력을 하나 둘 발견하다 보니, 애사심이 충만해져서 퇴소했다. 신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신입사원 교육이 있고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진급 교육을 받으러 또다시 연수원에 가야 했다. 나와 같은 신입 교육의 추억이 있는 '연'과 함께였다. 아직 신입 합숙교육에서의 감흥이 남았던 연과 나는, 다시 연수원에 갈 수 있어 기뻤다.
합숙교육을 가면 각 반마다 교육담당자가 있다. 한 반의 교육을 관할하는 담임 선생님 같은 존재다. 신입사원 교육 때는 이들을 '지도선배'라고 불렀다. 지도선배는 신입사원 교육에서 멘토 역할을 한다. 인간성도 좋아 보이고 말도 참 잘하고 유머러스한, 전문 훈련을 받은 교육에 특화된 사람들이다. 2주 합숙 기간 동안 정도 참 많이 들게 된다. 우리 반 신입사원 교육 지도선배 '준'은 배우를 닮아 아주 잘생긴, 게다가 인간성도 좋아 보이고 말도 참 잘하고 유머러스한, 그런 사람이었다. 비록 본인이 유부남인 것이 교육 말미에 밝혀져서 많은 여성 신입들을 슬프게 했지만... 준수한 외모를 겸비한 그의 뛰어난 퍼포먼스로 우리 반 40여 명의 신입사원은 모두 좋은 추억을 갖게 됐다.
이번 진급 교육에서도 준 선배를 만날 수 있었다. 반가웠다. 준은 여전히 신입사원 교육의 담임을 맡고 있었다.
진급 교육 우리 반 '담임'으로 신입사원 교육 때 얼굴을 자주 보아 익숙했던 다른 반 지도선배, '환'이 배정됐다. 환의 외모는 준보다 덜 준수했지만 인간성도 좋아 보이고 말도 참 잘하고 유머러스한, 전문 훈련을 받은 부류에 속했다. 준에게 환이 담임이라고 했더니 준은 환과 동기이자 친구라고 했다. 환이 준 선배와도 친구라니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진급 교육은 5일간으로 신입사원 교육에 비해 짧았다. 낮에는 계속 수업을 듣고 밤늦게까지 과제를 해야 하는 점에서는 신입사원 교육과 비슷했지만, 이미 회사를 몇 년 다닌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교육과정이라 신선함도 역동성도 적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반에 배정된 연과 나는 수시로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정보도 공유하며 연수원 생활을 최대한 즐기려고 했다.
가끔 담임인 환에게서는 친절한 문자가 왔다.
수업시간 중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제공된 날이면
"아이스크림 맛있게 먹어요~ ♡"
저녁을 먹고 나면
"저녁 맛있게 먹었어요?♡"
과제를 제출하고 자야 하는 날이면
"숙제 잘하고 잘 자요.♡"
환의 배려에 선배님도 힘내시라며 열심히 답장을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연은 진급 교육인데도 신입 교육처럼 이렇게 챙겨주는 젊은 담임이 있는 나를 부러워했다. 연의 담임은 나이 지긋한 차장이었다.
어느덧 합숙 교육의 마지막 날 밤이 됐다.
모든 과정은 끝났고, 다음날 오전에 있을 시험만 통과하면 퇴소다.
수다를 떨며, 내일 무슨 문제가 나올지 예측하며, 한편으로는 다시 회사 가서 일해야 하는 생각에 절망하며, 연과 나는 향후 몇 년간 없을 연수원에서의 마지막 날 밤을 최대한 의미 있게 보내려 노력 중이었다.
그때 환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 방에 와요~ ♡"
처음엔 방에 오면 과자나 음료를 줄 테니 동료들과 나눠먹으라는 식의 문자인 줄 알았다. 이 또한 환 선배의 배려인 줄 알았다. 근데 술을 먹은 것일까? 문자로 대화를 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환의 의도가 이상했다.
아양 섞인 하트를 담은 문자들이 마구 쏟아졌다.
"자기양, 와아아앙~~ ♡ "
"왜? 안 와용? 왱?!!"
"알았쪙 ♡♡♡"
(당시 휴대폰이 2G 폰에 캡처 기능이 없었어서 아쉽다)
식겁했다. 황당스러우면서도, 이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연은 맨 마지막을 'ㅇ' 받침으로 끝내며 귀여운 척 하는 남자들이 제일 싫다고 했다.
연과 논의하며 답장을 보냈다. 환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계속 문자를 보냈다. 다음에 올 문자가 궁금해진 연은 나와 쉽게 헤어지지 못했다.
연과 헤어지고,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늦은 밤까지도 환은 자기 방으로 오라는 문자를 계속 보냈다. 이제 잔다고 하고 답을 안 할 때까지 문자는 계속됐다.
공부를 하면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마음 한켠에는 신입사원들에 대한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혹시... 환이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을 갓 졸업한 어린 신입사원들에게도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러웠다. 순수 가득한 신입사원이라면 지도 선배의 멋있음에 콩깍지가 씌어 자신의 방에 오라는 지도 선배 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았다. 환은 막 신입사원 딱지를 뗀, 순진해 보이는, 왠지 입이 무거울 것 같은 어린 여성들을 상대로 이리저리 작업을 걸면서 매 교육마다 재미를 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 역시 순수해 보이고 입이 무거워 보이는 타입이기에, 환이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만일 그랬다면 환이 사람을 잘 못 본 거다. 나는 입이 가벼웠다.)
아침이 됐다. 무난히 시험을 봤고 결과 발표의 시간이 됐다.
내심, 하트를 뿅뿅 날렸던 환의 특혜로 최종 1등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나름 공정했나보다면서도, 1등을 한 사람에게 박수를 쳐주며, 과연 저 사람은 어젯밤 환의 방에 갔을까 하는 의심도 해봤다.
연수원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 옆자리에 앉은 연에게 말했다.
만일, 오늘 이후로 환이 먼저 연락을 해 온다면 그의 마음이 진심이었을 것이고, 연락이 안 온다면 이 사태는 매우 심각한 것 같다고...
안도해야 할지, 굴욕으로 봐야 할 지, 교육이 끝나고 단 한 번도 환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회사에 공식적으로 알려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함구하기로 했다.
이후로는 일에 치여서 이 이야기를 공론화할 여유가 없었고, 예전에 겪었던 많은 일들에 비하면, 웃어넘길 수 있는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다만 가끔씩 그가 순진한 신입사원을 이런 식으로 꼬시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사내 시스템에서 종종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곤 했다.
어느 날 그의 이름이 검색되지 않았다. 퇴사한 것이다.
환은 정의로운 누군가의 고발로 회사를 짤린 것일까?
누군가에게 덜미가 잡힌 것일까?
아님, 더 좋은 기회가 있어 이직했을까?
누군가의 고발로 덜미가 잡혀 짤린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