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1. 신입사원 금자씨의 허탈한 퇴사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의 뻔한 결말

by shadow

박원순 시장의 자살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다.

여성문제에 앞장서 온 인권변호사 출신 차기 대권 주자의 민낯. 그를 옹호하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들.


TV로 뉴스를 보던 금자는 불현듯 임단장이 생각났다.

당시 박원순 시장은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이었고, 임단장은 항상 그가 자신의 롤모델이라며 자랑스레 말하고 다녔다.


2004년의 일이다. S사에 취업하고 싶었지만, 바보같이 여러 황금 기회를 놓친 금자는, 이젠 그 어디든 좋다며 이름 없는 한 재단에 취업했다. 첫 직장인만큼 야심 차게 패기 있게, 그리고 의식 있게 일했다. 일 외에 회식도 열심히 참여했고, 술도 열심히 마셨다.


주말이었다. 돈을 번다고 자립하여 혼자 신촌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던 금자에게, 근처 병원에서 학회가 있었다며 금자보다 10살 많은, 30대 중반의 재단 설립자 임단장에게서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S대병원 치과의사로 술을 매우 좋아했다. (치과의사들은 모두 술을 좋아했다.) 금자는 임단장과 일하면서 저녁도 자주 먹었고, 술도 자주 먹었고, S대병원 그의 연구실에서 단둘이 새벽까지 함께 야근도 많이 했던 터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임단장이 있다고 하는 식당에 갔다.


저녁을 다 먹었다.

갑자기 임단장은 대뜸 금자의 손을 덥석 감싸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좋아졌어요"


... 음?

당시의 금자는, 그 나이 또래보다도 훨씬 순수했고 너무나도 친절했던, 친절한 금자씨였다. 금자가 잘해주는 남자는 모두 금자에게 빠져버리는 금자도 모르는 그런 매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님 금자가 남자들에게 너무 쉽게 보였던 건지, 의외로 금자를 흠모하는 남자들이 꽤 되었다. 그래서 금자는 누군가가 금자를 좋아한다고 고백할지도 모르는 괜한 두려움을 항상 안고 늘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고백하는 남자가 금자의 관심을 끌었던 남자들이었다면 참 좋았으련만, 금자에게 고백하는 남자는 모두 그녀의 타입은 아니었다. 당연히 고백은 성사되지 않았고, 이후엔 어색한 인간관계가 이어졌다. 금자는 이런 상황이 싫었다.


그런 와중에 금자보다 10살이나 많은 유부남에게서까지 이런 고백을 받다니, 금자는 충격 아닌 충격에 휩싸였다. 친구도, 아는 오빠도 아닌 유부남의 고백을 거절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대체 유부남마저 금자의 친절함을 오해하고 있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좋을지, 금자 본인은 이렇게 쉽게 보이는 사람인 건지, 그 후로도 한동안의 고민이었다.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간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금자는, 그리고 나름 의식 있는 사회과학 전공자였던 금자는, 서로의 행복한 직장생활을 위해서는 마음을 접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임단장에게 달래듯 말했다.


당분간의 어색함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금자의 거절이 거절로 느껴지지 않았는지 임단장의 애정(?)은 집착이 됐다. 애정을 담은 메일과, 사랑을 담은 문자 메시지가 지속됐고 신촌에 와 있다며 밤에 전화를 걸어 만남을 요청하는 경우도 많았다.


금자는 인내했고, 모든 요청을 거절했다. 첫 직장인데 1년은 다녀야 하지 않겠냐며 참고 다녀보려고 했다.


그러나 임단장의 행동은 더 이상해졌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제는 우리 아들 돌잔치를 했어요. 부모님께 절하면서 금자씨 때문에 부모님께 미안해서 하염없이 울었어요."


상황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친절함을 고수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금자도 한계를 느꼈다. 임단장에게 한 번만 더 이런 식의 일 외의 메시지를 보내거나 만남을 요구하면 다음날부터 회사를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임단장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금자는 진짜로 다음날부터 회사를 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팀장에게 '오늘부터 나갈 수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자초지종을 묻는 팀장에게 사유는 '성희롱'이라고 했다. 그녀의 첫 답변은 "그분이 그럴 리가 없어요"였다.


그렇다. 임단장은 수많은 여성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금자의 팀장도 그를 존경했고, 임단장이 근무하던 치과병원에서 일하는 치위생사도 그를 존경했다. 또한 임단장이 제안을 해서 재단 일에 열심히 봉사하는 치과의사도 그를 존경했다. 임단장을 존경했던 금자의 팀장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금자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거나, 정말 믿지 않았을 것이다.


팀장과 통화를 하고 서운해진 금자는 엉엉 울면서 엄마한테 전화했다. 집에다가는 이미 직장상사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는 말을 하고는 있었는데, 금자의 엄마는 금자가 엉엉 울면서 이제 회사 그만둘 거라고 하니까 이렇게 말했다.

"으이구, 미친년아. 그래서 잤냐?"

금자는 더 서럽게 엉엉 울면서 전화를 끊었다.


임단장에게서도 계속 전화가 왔다.

아예 전화기를 꺼버렸다.


다음날 아침이 됐다. 금자의 오피스텔 초인종이 울렸다.

모니터를 봤다.


그다!


금자는 소름이 끼쳤다.

임단장은 금자가 사는 오피스텔 호수를 어떻게 알았을까? 금자의 주소는 부동산과 집주인과 금자의 가족밖에 몰랐다. 이건 스토킹이었다. 너무 무서웠다.

금자는 놀란 입을 틀어막고 아무런 인기척도 내지 않았다.

임단장은 여러 번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문고리도 흔들어보더니 이내 곧 사라졌다.


금자는 그 후로도 쭉 회사를 나가지 않았다. 팀장과 통화와 문자를 한 기억은 있다. 임단장이 금자가 임단장을 좋아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 사직서나 진상 조사 등의 자료 제출은 일절 요구하지 않았다.

금자는 퇴사를 위한 아무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퇴사를 '당했다.'


금자와 연락이 차단된 임단장에게서는 아주 장문의 메일이 여러 번 왔다. 초반에 온 것은 사랑 고백과 위로의 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는 읽어보지도 않았다. 아직도 금자의 메일함 어딘가에 한 곳에 모여있는데 굳이 찾아보지 않고 있다.


금자는 임단장 때문에 백수가 되었는데 멀쩡히 자리를 유지하며 폭탄 문자와 전화와 폭탄 메일을 멈추지 않는 임단장에게 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느 날 작정을 하고 나갔다.


오피스텔 앞에 서있는 임단장을 지나쳐 파출소 근처 신촌 지하철역 앞에 섰다.

임단장은 금자를 따라오고 있었다. 금자는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개찰구 앞에서 임단장에게, 내심 남들도 모두 들으라고 '지금 당장 당신 집으로 가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 와이프랑 같이 얘기 좀 해야겠으니, 와이프를 만나러 함께 가자'고 울면서 외쳤다.

금자 생각에 ‘지금 내가 너의 집에 가서 와이프를 만나겠다’고 한 것은 금자가 임단장에게 날린 아주 크나큰 한방이었다. 이 말을 들은 임단장은 아무 말하지 않고 금자를 한참 쳐다보더니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사라졌다.

이것이 금자가 본 임단장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 이후로는 연락도 오지 않았고, 메일도 오지 않았다.


이렇게 금자의 첫 직장생활은 5개월 만에 허탈하게 끝났다.

월급도 적은데 독립한 것 때문에 경제적 타격을 심하게 받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도 갖게 됐다.

그렇게 그만둔 것이 너무 화가 나서 위경련으로 고생했고 정신을 잃은 적도 있다.

전화번호는 두 번이나 바꿨고 잠수를 탔다.

오피스텔에서 나와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갔고, 이후로 애써 독립하지 않았다.

연애라는 것과는 담을 쌓았고 까칠함을 키워갔다. 까칠한 금자씨가 됐다.


금자는 뼈아픈 교훈을 새겼다.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무조건 '여자인 나'였다. 여자도 금자의 편이 아니었다.

다음번에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 이번 경험을 교훈 삼아 싸워보겠다고 결심했다.


금자는 가끔 짜증이 아주 많이 난다.

금자가 아직도 결혼을 못하고 있는 것은 임단장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자의 커리어가 망가진 것 역시 임단장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자가 이렇게 까칠해지고 사람을 못 믿는 것도 임단장 영향이 크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이런 속사정도 모르고 짜증 내는 금자를 두고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한다.

그래도 금자는 까칠하게 변한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금자는 박원순 시장 사건을 보며 임단장이 일말의 가책을 느꼈을지 궁금하다. 2004년 그때의 사랑이었던 금자를 떠올렸을지, 아님 그 이후에도 꾸준히 쌓았을지 모를 수많은 여성들과의 추억을 떠올렸을지, 그것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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