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인터넷을 달궜던, 아니, 지금도 인터넷 한구석에서 존재를 과시하는 사건이 있다. 돌돔 매운탕 사건. 이름 그대로 지인에게 선물 받은 돌돔으로 매운탕을 끓여 먹은 한 네티즌의 글이 온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일이다.
읽는 장소도 시간도 다르지만 다들 반응은 같았다. '와, 돌돔을 그렇게 먹다니!'
형태는 감탄사지만 의미는 감탄이 아니다. 탄식이다. 아깝다. 킬로 당 10만 원 가량하는 귀하디 귀한 생선인 만큼 당연히 재료 본연의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도록 회로 먹는 것이 제일인데, 그런 생선을 진한 양념으로 재료의 맛을 가리는, 싸구려 생선에 최적화된 요리인 매운탕으로 해 먹었으니…. 보는 이마다 혀를 찰밖에.
그는 전문 요리사가 아니었던 만큼 그저 젊은이의 귀여운 실수로 봐줄 수 있지 않나 싶지만, 그렇게 넘기기엔 너무나 값비싼 생선이었다.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를 읽었던 기억을 반추할 적에 떠오른 키워드가 그것이었다. 매운탕.
이 소설은 정말 굉장한 소설이다. 보통 말초적인 쾌감을 주는 미디어를 꼽으라면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의 스크린을 통한 영상 매체이고 책에서는 그런 인상을 잘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건 그러한 종류의 쾌감을 주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감상을 꼭 적어두고 싶었고. 누군가 읽을 만한 소설을 추천받을 때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권하지 않았다. 그 소설이 어째서 남에게 권할 만큼 좋은 것인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뭔가 말하려다가도, 말문이 막힌다. 머리에 남은 게 없으니까.
참 희한하다. 분명 재미있게 읽었고, 무릎을 탁 칠만한 대사가 있던 것도 같았는데, 막상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머리에 남은 것 없이 전부 휘발되어버린 것이다. 곧바로 다시 읽어보아도 마찬가지. 왜 이럴까. 어떻게 다 읽어놓고도 머리에 한 줄도 안 남을 수가 있는 건가. 순간 청년 치매를 걱정했을 정도로, 너무나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단순히 말초적인 쾌감만 느꼈기에 설명이 쉬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말을 잃을 줄이야. 이 경험을 설명하는 건 술을 한 방울도 마셔보지 않은 사람에게 좋은 술의 맛을 설명하는 것과 같아서.
나와 남의 체험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되질 않았다. 남에게 고통을 온전히 이해시키는 게 어려운 것처럼, 기쁨을 이해하도록 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구나 싶다.
사실, 언어라는 것이. 예술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이 결국은, 전할 수 없는 내면의 무언가를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된 것 아니던가. 예술가가 존경받는 건 그런 불가능에 항상 도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어쨌든 이 소설은 주절거림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좋은 술을 마시고 얼근히 취한 것처럼 기쁨에 겨워 말을 부르게 만든다. 짧고 단순하지만, 캐릭터와 사유가 진하게 배인 문장으로 시원하게 쭉쭉 뻗는 문장. 보통 지루하지만, 필요하기에 넣어야만 하는 인물 간의 시시콜콜한 대화도 속도감이 있어 피곤함이 없다. 번쩍이는 위트는 덤.
그리고 문장의 힘이 골고루 분배되어 있었다. 사실 주인공이 사장을 꼬집는 부분이나, '나는 내가 옥수수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닭들은 그걸 모른다.'와 같은 문장처럼 인상 깊은 구절도 많은데, 그런 인용하기 좋을 만큼 '인상적인 문장'도 주변의 문장과 다른 무게를 지닌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종종 완전한 몰입을 '트랜스상태'에 비유해 말하곤 하는데, 내겐 이 소설의 경험이 그랬다. 그동안 소설을 읽었을 땐 몰입을 하더라도 거리가 있었다. 아무리 몰입하더라도 나는 내가 객석에 앉은 관객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읽는 동안 추임새가 들어간다. 나의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훈수를 두기도 한다. 이 친구야, 그러면 안 되지. 저 친구 곧 죽겠군. 뭐, 그런. 그런데 이 소설을 읽을 땐 그런 종류의 거리감이 없었다. 나는 내가 관객이라는 자각도, 글을 읽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조금의 제동도 없이 주인공의 생각을 따라간다. 아마 그래서 뇌리에 남는 게 없지 않았나 싶다. 내 경험이 끼어들 틈이 없었으니.
그런데, 사실, 감상을 적어두고 나니 굉장히 부끄러워졌다. 문학에 정답은 없지만, 모범답안은 있다. 돌돔 요리의 모범답안이 회, 오답이 매운탕이었던 것과 같이.
슬라보예 지젝이 즐겨 쓰는 농담에서 따왔다는 작가의 언급이 있는 만큼, 지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해석하는 게 모범답안이다. 그러니 이상우 교수의 《김영하의 소설 「옥수수와 나」 연구(2014)》같은 논문과 가까워야 하며, 앞서 말한 그런 말초적인 쾌감은 오답인 것이다.
재료의 가치를 극대화해야 하는 건 요리나 글이나 다르지 않다. 좋은 질료로 쓰인 글이라면, 글도 응당 그에 걸맞은 질을 담보해야만 한다. 문학성과 유용함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글이 아니라 낙서이다. 무의미한 텍스트의 나열에 불과한, 낙서.
교양. 영혼의 질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는 척도. 지금도 인문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영역에서, 교양 없이도 우뚝 선 기업인도 이따금 인문학적 소양을 증명하지 못하면 천박한 사람이라는 험담을 듣는데, 지식인의 교양 축적수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취미인 독서는 오죽할까.
이런 부담이 심한 탓에 독서는 다른 취미에 비해 감상이나 후기가 적은 편이다. 출판업계는 독자들이 그런 식으로 부담을 가지고 입을 다물길 원치 않았다. 까놓고 말해, 제품도 사용 후기가 많아야 팔리듯, 책도 사용 후기인 감상문이 많아야 읽히고 팔린다. 각종 도서 플랫폼에서 후기를 쓰면 적립금 등의 혜택을 주는 이유가 그 때문.
그런데 고작 몇백 원의 이익을 얻기 위해 자신을 시험대에 올리는 건 수지맞지 않는 장사다. 그래도 교과서나 텔레비전, 혹은 수능 지문 등을 통해 소개된 작품은 감상평이나 정보가 많다. 정보가 많아 모범답안을 유추하기도 쉽고, 단순한 감상을 말해도 이미 이슈가 됐기에 그런 감상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
극장영화랑 똑같다. 친구들 혹은 가족들과 영화를 보고 나오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배우 얼굴이 화면 한가득 채우는 게 좀 부담스러웠다.', '액션 왜 이렇게 없느냐.', '그래도 사막 참 멋지더라.', '우주선 디자인 기깔나더라.' 등의 일차원적인 감상.
그렇지만 즐겁다. 서로 공통된 화제로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 자체로 행복하다. 서로 감정의 울림을 공유하는 그 자체가 참으로 즐거운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걸 두고 문제라 하지 않으며, 수준을 분별하기 위한 척도로 쓰지 않는다.
극장 방문 횟수 세계 1위의 거대한 영화 시장을 만든 건 바로 그런 풍토였다. 출판업계의 목표도 그런 것이었다. 책이라는 취미가, 목소리에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하는 풍토를 만드는 것.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이미 패러다임이 변한 상태이다. 힐링 에세이의 등장으로. 일상 속 순간의 스침으로만 남을 감정과 생각을 모아둔 책. 그렇기에 위로가 되는 책.
대단한 업적의 인간이나, 기나긴 경력을 마치고 은퇴한 이나, 글솜씨와 통찰이 번뜩이는 논객이 남기곤 하는 기존의 에세이와 달리, 힐링 에세이의 저자는 평범한 직장인, 평범한 젊은이, 평범한 학생. 즉, 우리들이다.
그렇기에 힐링 에세이를 읽고 감상을 말하는 데에 부담이 없다. 힐링 에세이의 책이 말하는 게 곧 나의 감정, 나의 순간, 나의 목소리인데, 모범답안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내 안에만 있는 목소리를 편안히 말할 수 있다.
'맞아, 나도 그래.', '참 힘들었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나는 나아갑니다.'
그런 성냥불 같은 작은 한 마디가 모여, 얼어붙은 도서시장을 녹여주는 태양이 되어주었다. 그저 작은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말이다. 부끄러움을 거두어주는 자유의 공기가 낳은 쾌거다.
책을 읽다 쓴 글이니만큼 책으로 말하긴 했지만, 인생의 다른 영역도 그렇지 않을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유를 행하는 게 나만이 아닌, 세상에 온기를 주는 행위는 아닐까.
그러고 보면 돌돔으로 매운탕을 끓였던 청년은 사람들 입에 얘깃거리로 올랐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푸짐한 식탁의 기쁨을 한껏 누리며 만족했을 뿐이다. 이미 양껏 먹었고, 맛도 좋은 식탁을 누렸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그에 감명을 받았는지, 이후로도 돌돔 어묵, 돌돔 생선까스 등을 해 먹는 이들도 등장했고, 이들 또한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자, 이제 요리를 해보자. 요리의 열기로 세상을 데워보자. 돌돔이건 피라미건 얼큰하게 끓여서 즐겨보자.
그렇게 우리 인생의 식탁은 한껏 풍성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