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의 늪

by 눈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한번은 출간을 코앞에 두고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인 책의 최종 원고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검토해달라는 출판사의 의뢰를 받았다.

1년 전쯤에 번역했던 책인데 드디어 출간된다니 반갑기도 하고, 또 번역 일이 없어 한창 심심하던 터라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오류나 오탈자를 모조리 잡아내겠다는 각오로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검토하면 할수록 오류나 오탈자는 보이지 않고 뭔가 조금 어색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만 종종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마감 때는 나름대로 만족하고 보낸 원고인데 말이다.

사실 출판사 편집자의 교정도 끝난 상태니 딱히 틀렸다고 할 문장들은 아니지만, ‘아, 이건 저렇게 표현했으면 더 매끄럽고 좋았을 텐데’라는 색안경을 쓰고 보면 죄다 뜯어고치고 싶어지는 것들! 그런 문장들이 새하얀 모니터 위에 ‘볼드체’로 도드라지면서 자꾸 눈에 걸리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더 읽고, 더 다듬을 걸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외국어 실력? 우리말 실력?


교정은 내게 늪과 같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지는 늪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고칠 부분이 생기고 더 고치고 싶어지는 교정의 늪.

요즘엔 번역 작업을 했다 하면 중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시간보다 ‘우리말’을 ‘더 적절한 우리말’로 수정하고 다듬는 시간이 더 길다. 중국어 사전을 찾는 일보다 우리말 사전을 찾는 일이 더 많다.

“외국어만 잘하면 번역 일을 할 수 있나요?”라고 번역가 지망생들이 물을 때마다 “외국어 실력도 중요하지만, 우리말 실력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라고 약속이나 한 듯이 번역가들이 대답하는 것도 다 나와 같은 마음에서가 아닐까.



벗어놓은 양말 냄새


하지만 늘 마감은 정해져 있고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언제까지고 교정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는 없는 법. 교정을 볼 때마다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발각되는 나의 모자란 원고를 기어코 납기일에 맞춰 보내고 나면, 스스로 아쉬움과 부끄러움, 약간의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본 책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탈고한 책은 절대로 다시 읽지 않는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마치 벗어놓은 양말 냄새를 맡는 것과 같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그의 문장에서 고릿한 양말 냄새가 날 리야 없겠지. 다만 제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자기 손을 떠나 독자에게 날아간 글을 다시 읽으면 뭔가 찝찝하고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보여서 그런 말을 했으리라.

그러니 하루키처럼 대단한 작가도 아닌 나의 번역 원고는 아무리 여러 번 교정을 봤다 해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자꾸 나올 수밖에. ‘영원히 100퍼센트 만족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라고 자기 위안을 건네본다.



그래도 웬만하면


"자기 글의 완성도를 자기가 평가할 수 있을까. 그렇게 쓸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쓴 사람은 자기 글의 문제점을 보기 어렵다. 눈에 잘 안 들어온다. 또 부족한 부분이 보여도 고칠 기력과 시간이 없을 때가 많다. 뒤심이 달리면 ‘이만하면 된 거 아닌가?’ 하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린다. (중략) 제법 말쑥해진 최종 원고를 보면 가슴이 철렁하다. ‘이만하면’ 됐다며 덮어 두려고 했던 거친 원고가 떠올라서다. ‘이만하면’이라는 말은 위험하다. 됐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대개의 원고는 ‘웬만하면’ 한 번 더 다듬는 게 낫다.
-은유 <쓰기의 말들> 중에서


이 세상에는 완벽한 문장이란 없지만 문장은 고칠수록 나아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뻔하지만 참된 진리인 이 말을 일하면서 나는 계속 실감했었다. 그래서 하루키에게 위안을 받으면서도 ‘이만하면’ 됐다는 악마의 속삭임에 빠지기보다는 ‘웬만하면’ 한 번 더 교정의 늪에 빠지려고 한다. 앞으로 편집자에게서 시뻘건 교정지를 되돌려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끄럽지 못한 문장 때문에 독자 머리에 뿔이 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마감일에 이메일의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까지 나는 교정의 늪에서 발버둥 칠 생각이다.

…라고 쓰면서 이 글은 또 얼마나 교정을 보고 또 봤는지.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