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나오면 서점으로 갑니다

'누구누구 옮김'이라는 글자

by 눈큰


유별난 축하 행사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후에 한동안 내가 번역한 책이 출간되면 늘 서점으로 달려갔다.

대형서점 책꽂이 한쪽 구석에 숨바꼭질하듯 꼭꼭 숨어 있는 내 책. 존재감도 없이 꽂혀 있는 그 책을 나는 용케도 금방 찾아내곤 했다. 그 책을 책꽂이에서 반쯤 꺼내어 둔 채 그 앞에서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누가 볼 새라 재빨리 인증샷을 찍었다. 그러고는 그 책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처럼, 우연히 좋은 책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무심하게 책을 집어 들고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읽었다. (마음 같아선 옆에 서 있는 낯선 사람이라도 붙들고 ‘이 책을 제가 번역했어요!’라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볼 게 뻔하니까 꾹 참고!)

다른 번역가들도 그렇게 했을까? 나는 그랬다. 몇 번이나 그랬다. 내 이름이 적힌 책이 서점에 있는 게 마냥 신기했다. ‘누구누구 옮김’이라는 글자는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고치려고 밤을 새웠던 내게 번역료보다 더 큰 보상이었다.


오프라인 서점뿐만 아니라 온라인 서점도 방문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는 것부터가 신나는 일이었다. 물론 내 이름을 검색하면 나와 이름이 똑같은 영어 번역가, 일본어 번역가, 심지어 중국어 번역가나 국내 작가의 책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열되었지만, 나는 기어코 책 제목이 아닌 내 이름을 검색하며 혼자 가슴이 설렜다. (동명이인 작가를 분류해서 따로 소개해 주는 온라인 서점도 있습니다. 고맙게도.)

이름 검색이 끝나면 서평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출판사에서 마련한 서평 이벤트 덕분에 달린 서평들이 많았다. 의무적으로 쓴 느낌이 물씬 풍겨 오는 무미건조한 서평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좋았다. 혹시라도 번역이 이상하다는 말은 없나 싶어 괜히 가슴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간혹 진짜 독자가 쓴 것 같은 서평이라도 발견하면 별 내용이 없어도 읽고 또 읽으며 행복해했다.



증정본을 받습니다


사실 서점에 가기 전에 출판사가 번역가에게 주는 증정본이 대부분 내게 먼저 도착한다. 책 옆면에 ‘드림’ 혹은 ‘드립니다’라는 도장이 꾹 찍혀 배달되는 세 권의 증정본. 나는 포장을 뜯자마자 가족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그러면 가족들은 역자 이름이 코딱지만큼 작게 적혀있다며 장난스레 나를 놀리곤 했다.


한번은 번역 에이전시 담당자가 ‘역자님, 수개월간 고생이 많으셨어요. 깔끔한 번역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노오란 포스트잇에 적어 증정본에 붙여 보내왔는데, 어찌나 내 기분도 깔끔하고 좋던지. 그 포스트잇은 아직도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다.

책 자랑이 끝나면 새 책 냄새를 맡으며 ‘이 책은 누구에게 선물할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내 이름이 적힌 책을 선물 받은 지인들은 하나같이 “이야~ 대단한걸!” 하며 함께 어깨를 으쓱거리곤 했다.



역서가 많아질수록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일들에 무감해졌다. 내가 번역한 책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조금씩 무덤덤해졌달까? 물론 책이 나오면 여전히 기쁘고 뿌듯했지만 서점으로 막 달려가지는 않았다. 인터넷 서점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 이름을 검색하지도, 또 서평을 꼼꼼히 읽어보지도 않았다. 증정본을 받아도 그저 휘리릭 대충 훑어보는 게 다였다. ‘책이 생각보다 세련되게 나왔네, 표지 디자인이 예쁘네’ 등 간단한 감상평을 혼잣말처럼 하고 나면 가족에게 자랑하지 않고 곧바로 책장에 꽂았다.

지인들에게도 굳이 내 책을 선물하지 않았다. 그들도 ‘그래? 또 새 책이 나왔나 보다’ 할 뿐, 처음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다 보니 세 권의 증정본은 고스란히 책장에 쌓였고 기다란 책장 하나가 어느 순간 내가 번역한 역서로만 가득 찼다. 누가 보면 번역을 엄청 많이 한 줄 알겠군.



뒤늦은 ‘좋아요’


얼마 전 오래간만에 마음이 동해서 최근 출간된 내 역서 하나를 검색해보았다.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하며 번역했던 책이라서 출간 후의 반응이 은근 궁금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내 이름을 검색하고 있자니 갑자기 옛일이 생각났다. 역서가 나올 때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서점에 나가보던 내 모습, 그때의 내 마음이…. 어딘가 찌르르했다. 결국 그날 나는 미뤘던 숙제를 하듯 여태까지의 내 역서들을 하나하나 다시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온라인 서점들은 물론이고 SNS, 블로그까지 모조리. 그동안 정말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단, 예전 역서 중에 나도 모르게 개정판이 나온 책이 몇 권이나 있었다. 그중에는 몹시 부끄러운 내 초기 역서도 있었다.

그다음으로 흥미로웠던 건 서평만큼 많았던 책 인증샷이었다! 특히 내가 번역한 동화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들이 여기저기 올라와 있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상당히 집중해서 책을 읽고 있는 (물론 그중에는 엄마의 성화에 마지못해 포즈를 취한 아이들도 있겠지만) 어린 독자들의 모습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내가 이걸 놓치고 있었구나 싶었다.

결국 그날 나는 밤이 늦도록 아주 오래된 서평들과 인증샷들을 일일이 찾아보며 뒤늦은 ‘좋아요’를 꾹꾹 눌렀다. ‘앞으로 더 열심히 번역하겠습니다!’라고 쓴 내 마음속 각서에 도장을 꾹꾹 눌러 찍듯!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