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사주
대학을 다닐 때 점을 엄청나게 잘 본다고 소문난(진짜 점쟁이처럼 사주책도 펼쳐놓고 봐주던) 학과 선배가 내 사주를 봐준 적이 있다. 나는 ‘눈땡그리’라는 당시 내 별명에 어울리게 눈을 땡그랗게 뜨고 얌전히 점괘를 기다렸는데 선배가 말했다.
“넌 나중에 돈방석에 앉겠구나! 흠, 그런데 옆에 사람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지? 돈방석에 앉아 있는데 옆에 사람이 없다니. 돈은 많이 버는데 외로울 팔자라는 건가…? 하고 속상해하는 것도 잠시, 나는 생각을 조금 바꿔서 위대한 정신 승리를 이루어냈다. 그 사주의 뜻은 아마도 내가 나중에 돈을 엄청 많이 벌어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기 때문에 옆에 사람이 없는 거라고, 돈방석이 놓인 서재에 앉아 혼자 여유롭게 책도 보고 글도 쓰느라 그런 거라고.
쉰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그때 이룬 정신 승리의 힘으로 버티고는 있는데…. 그게 대체 언제쯤인 걸까?
나 같은 번역가의 먹고살기
웃자고 한 이야기고, 사실 나는 그런 점을 믿지도 않으며 돈방석은 꿈꾸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첫 번역료를 받았을 때부터 세웠던 작은 목표라도 이루길 바랄 뿐이다.
그 목표는 바로 남편에게 자동차를 사주는 것이다!
19년 전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첫 번역료를 받고서 너무 기쁜 나머지 남편에게 큰소리쳤다. 나중에 번역료 모아서 근사한 새 차를 뽑아주겠다고! 뒤늦은 번역가의 꿈을 누구보다 응원해 준 남편에게 고맙기도 했고, 그땐 한창 눈에서 꿀이 떨어지던 신혼이었기에 못 해줄 말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 오랜 세월 동안 차 한 대 값도 못 벌만큼 번역이 돈이 안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오해 마시길! 일단 이건 잘나가는 번역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덜 나가는 어느 아줌마 번역가의 이야기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지방대를 나와 별다른 스펙도 없이 이런저런 회사를 전전긍긍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번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경력을 제대로 쌓기도 전에 육아 때문에 두 번의 긴 공백기를 가졌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로는 그나마 꾸준히 번역 일을 하고 있지만, 다음 번역이 줄지어 기다리지는 않아서 번역 의뢰가 들어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릴 때도 있다.
게다가 남편과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남들이 보면 철없어 보일 정도로 한 푼 없이. 그래도 결혼 후 남편이 성실하게 일해서 번 돈으로 알뜰살뜰 살았고, 지금은 넉넉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은 살고 있다. 하지만 살면서 목돈 나갈 일이 왜 그리도 많이 생기는지, 월급쟁이 살림에 갑작스러운 목돈 지출은 언제나 큰 부담이었다.
그럴 때 다행히 내 노동의 값이 한몫했다. 드문드문 생겼던, 야무지게 모아두었던 내 번역료가 황금 같은 보너스가 되어주었다.
차 값으로 모아둔 번역료를 부족한 생활비로 쓸 때마다 우리 부부는 농담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괜찮아. 새 차 몇 달 더 늦게 사면 되지 뭐!”
갑자기 우리 집에 있는 비싼 가전제품이 고장 나기라도 하면 이런 농담도 했다.
“(드라마 겨울연가 원빈 말투로) 얼마니? 얼마면 되니? 200페이지짜리 책 한 권 번역하면 되니? 좀만 기다려봐. 이참에 최신형으로 확 바꾸자!”라고.
그렇게 웃고 넘어가는 사이, 남편은 오래전에 번역료를 보태어 산 중고차를 계속 타고 다녔다. (지금은 다행히 남편 회사에서 나오는 새 차를 공짜로 타고 다닌다, 아싸, 돈 굳었네!)
내 번역료 단가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제자리인데, 자동차 값은 왜 그리 팍팍 오르는지. 돈이 좀 모였다 싶으면 목돈 나갈 일이 생기고, 또 좀 모였다 싶으면 자동차 값이 오르고….
그나마 운 좋게 처음부터 좋은 번역 에이전시를 만나서 번역료 떼일 걱정은 없이 일했다. 물론 스펙이나 경력(어쩌면 실력) 때문에 다른 번역가보다 낮은 단가의 번역료를 받는 건 안타깝지만! 언젠간 단가를 조금 더 높게 불러도 될 날이 오겠지?
위대한 정신 승리
혹시 이런 농담을 들은 적 있는가? “의사는 마누라가 좋은 직업이고, 판검사는 처가가 좋은 직업이다.” 소위 돈 잘 버는 ‘사’자 들어가는 일등 신랑감들이 우스개로 자조하는 농담이다. 반면 번역가는 아내나 처가 부모님들이 반색하는 직업은 아니다. 그래서 난 그들의 농담에 이렇게 첨가한다. ‘번역가는 본인만 좋은 직업이다.’
- <출판 번역가로 먹고살기> 중에서
어쨌거나 이 세상에 번역 일을 해서 진짜 부자가 된 사람이 있긴 하겠지? 하지만 이번 생에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남편에게 새 차를 꼭 사줄 거라는 것도!)
이리하여 쥐뿔도 없는 아줌마 번역가는 또 한 번의 위대한 정신 승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