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백수
얼마 전 또 한 권의 책 번역을 끝마치고 또다시 백수가 된 나는 3주가 지나도록 놀았다.
가정주부로서 마침 가정의 달을 맞이해 가정을 챙기느라 바쁜 와중에도 기어코! 틈틈이! 야무지게! 놀았다. 아이들이 온라인 과제를 하느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낮에는 혼자 얄밉게 거실 소파에서 간식과 리모컨을 양손에 쥔 채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정주행했고 졸리면 낮잠도 잤다. 밤에는 애들처럼 게임도 많이 했다. 오래전에 친구들과 PC방에서 컴퓨터로 즐겼던 게임이 마침 스마트폰 게임으로 나왔는데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밤마다 추억이 방울방울 했다.
다음 일을 기다리는 나의 자세
“저울의 한쪽에 착실히 말들을 올려 놓으며 한 권의 번역을 마치고 나면 머릿속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듯 일상적인 대화조차 더듬고 버벅대고 순서를 바꾸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백석을, 박두진을, 이문구를, 김우창을 읽었다.”
김남주 번역 에세이 <나의 프랑스식 서재> 중에서
번역이 끝나고 아쉽게도 다음 번역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 때, 당장 며칠은 백수처럼 아무 생각 없이 놀다가도 이내 번역가로 돌아와 늘 정해진 일을 한다.
이제 막 끝낸 번역에서 터득한 나만의 번역 팁 같은 걸 워드 파일에 잘 기록해두고, 편집자가 고쳐준 교정 내용도 오답 노트에 따로 모아둔다. 그런 다음에는 그동안 놓친 중국 관련 최신 뉴스 등을 보거나 우리말 퀴즈 프로그램이라도 나갈 사람처럼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공부한다.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한다. 책 한 권을 번역하느라 머릿속에서 꺼내 쓴 단어를 다시 채워 넣기 위해서 다양한 분야의 책(되도록 문장이 단정한 책)을 골라 읽는다. 그림 동화책, 잡지, 시집도 많이 본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 뇌가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그게 번역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세상은 넓고 번역가는 많으니, 조금이라도 경쟁력 있는 번역가가 되기 위해 항상 성실하게 그야말로 예습 복습을 한다.
한 가지 믿는 구석
그렇다면 이제는 조금 엉뚱한 이야기. 만약 내가 번역을 끝내고 매번 그렇게 ‘슬기로운 번역가 생활’을 했다면 지금보다는 더 잘나가는 번역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상은 한동안 신나게 놀고도 게으름을 더 피우느라 예습 복습은 시작도 못했는데 갑자기 들어온 번역 일을 곧바로 시작해야 할 때도 많았고(그나마 다행인 경우), 또 한동안 신나게 놀고 게으름도 실컷 피웠는데도 여전히 백수이면서 예습 복습은 하지 않고 불안한 미래만 걱정하고 있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때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다. 바로 나만의 징크스다! 한동안 번역 의뢰가 안 들어와서 시간이 남아돌면 나는 일부러 번역과 전혀 상관없는, 완전 엉뚱한 딴짓을 벌이곤 한다. 그러면 그날 혹은 그다음 날 정말 희한하게도 번역 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이 온다. 가령 백수 기간에 중국어와 우리말 공부를 하다 말고 느닷없이 ‘이번엔 영어 공부를 좀 해야겠어’ 하며 두꺼운 영어책을 사서 한두 페이지 공부하기 시작하면 다음 날 의뢰 메일이 오는 식이다. 또 이제나저제나 다음 번역 일이 들어오길 기다릴 때는 조용하던 휴대폰이 간만에 가족끼리 어디 놀러라도 가려고 숙소를 예약하거나, 여행 짐을 싸고 있거나, 아니면 여행 당일 집에서 출발하면 기가 막히게도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다. 큰맘 먹고 서평 블로그를 시작해 글을 한두 편 올렸을 때도 그랬고, 모처럼 시간이 나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집수리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도 그랬다. 번역 이야기를 브런치에 써서 올리기 시작한 것도 이 징크스 덕을 보려는 마음이 내심 있었다. 실제로 그 징크스가 또 작용해서 새 번역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고.
아무튼 이렇게 하나라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덜 나가는 프리랜서 아줌마의 마음이 그나마 덜 힘들다. 주로 재수 없는 일, 불길한 징조의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키는 징크스가 나에겐 행운을 부르는 네 잎 클로버인 셈이다.
그나저나 이번 글쓰기 약발도 슬슬 떨어져 가는 것 같은데 딴짓을 좀 벌여볼까? 백수가 된 지 한 달도 안 되었지만 다시 번역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또 슬그머니 징크스 카드를 꺼내려고 한다.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