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작업실은 계속 열려있습니다

첫 번째 매거진을 마무리하며

by 눈큰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니까


2019년 늦가을, 몇 년간 이어지던 번역 일이 하루아침에 뚝 끊긴 채로 석 달을 보낸 후 불안한 마음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런 번역가도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다른 번역가들이 쓴 글을 읽으며 웃고 울고 공감했으면서도 정작 내 이야기를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무 해 가까이 번역을 해왔지만 역서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중 제목을 들으면 알 만한 책도 없는 소심한 아줌마 번역가니까. 나름대로 산전수전은 겪었지만 공중전까지는 못 해봐서 근사한 경험담이나 노하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 누구나 글을 쓰기 전에 자신에게 묻게 된다는 ‘내 이야기도 글이 될까?’라는 질문에 막혀 가만히 서 있었을 수밖에.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크게 내세울 것은 없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비록 자신감과 자존감은 바닥이지만 ‘번역가’라는 타이틀만큼은 늘 소중하게 움켜쥔 채 ‘번역계 변두리에서 오랫동안 알짱거렸으니까 내게도 뭔가는 있겠지. 그러니 여태까지의 내 삶을 정리하듯 번역 일에 관한 글을 써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비록 잘나가는 번역가의 글은 못 되도 덜 나가는 번역가의 글은 되지 않겠어?’라고 말이다.



글을 쓰며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에 우선 일하면서 틈틈이 써왔던 일기들과 예전 블로그에 올렸던 번역 에피소드 등을 쭉 읽어보았다. 생각보다 쓸 만한 내용이 많았다. 그 많은 이야기를 글로 꼬박꼬박 남겨놓다니 스스로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또 내가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번역을 해왔는지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꼭 말하고 싶은 주제를 몇 가지 뽑고 기승전결 순서도 정했다. (계획 좋아하는 제가 그런 계획을 안 세웠을 리 없죠.) 그리고 차근차근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가볍게 막 쓴 글 같아도 나름 다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뒤에 손도 떨고 다리도(?) 떨어가며 글을 써 올렸다.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며 글로 정리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에 아무도 시키지 않은 데다가 돈이 되는 일도 아니라서 게으름을 피우기는 쉬웠다. 그러는 사이 징크스가 어김없이 발동해서 번역 일도 다시 들어왔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글쓰기! 무슨 일이 있어도 끝내고 싶었다.


글을 올릴 때마다 조회수나 좋아요 수, 구독자 수가 오르면 기분이 정말 좋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가장 좋았던 건 어찌 되었든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며 이 글쓰기를 완성한 일이 아닌가 싶다.


언제까지나 번역가로


돌이켜 보면 ‘제발 일복 좀 터져봤으면’ 하고 보낸 세월이었다. 또 허점투성이 번역가에게 번역은 언제나 어려웠다. 샘플 번역은 왜 그리도 떨어지는지, 무슨 의미인지 도저히 모르겠는 문장은 왜 꼭 책마다 한두 개씩은 박혀있는지, 번역을 끝낸 최종 원고에는 왜 여전히 어색한 부분이 남아 눈에 걸리는지….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다른 길로 달아나지 않겠다는 막연한 의지 같은 것이 있어 버티고 버텼다. 글과 함께 조용히 일할 때의 몰입감, 딱 맞는 표현을 찾거나 꼬인 문장을 풀었을 때의 짜릿함, 내 이름이 적힌 책이 하나둘씩 쌓이는 기쁨은 그 모든 것을 상쇄시키니까. 그래서 내 소망은 이렇게 덜 나가도 좋으니 10년, 아니 20년만 더 번역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몸은 늙어도 글은 늙지 않는 번역가가 되는 것이다.



그럼 된거지


공교롭게도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은 글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백수다. 아직 다음 의뢰가 안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번역 작업실인 우리 집 안방 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번역 일을 기다리며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앞으로도 번역 의뢰는 희망하는 만큼 자주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번역가일 때보다 백수일 때가 많은 나의 글에는 도움이 될 만한 번역 경험담이나 노하우가 앞으로도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계속해서 번역하고 글도 쓸 것이다. 이 소소한 글을 읽고 소소한 위로와 응원을 받는 사람이 어딘가엔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럼 된 거지. nn



* 이 매거진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