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원 Feb 14. 2020

겨울 끝 달리기

하루의 끝에 달리기 시작했다. 날이 풀렸다.

달리기 시작하면, 숨이 헉헉 차오르기 시작하고도 한참을 더 뛰고 나서야 멈추곤 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폐병을 앓는 일이 잦았다. 일찍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탓이다. 조금 더 기다렸어도 어차피 보게 되었을 세상이 무어가 그리도 궁금했었는지, 나는 굳이 몇 주 일찍 태어나 건강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태어났을 때, 그 조그마한 폐에서 피가 흘러나왔었단다. 세상으로 빨리 뛰쳐나온 것을 후회해보기도 전에, 엄마 품에 안겨보기도 전에 나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었단다. 그렇게 2주일을 꼬박 치료를 받고 엄마 품에 안길 수 있었다고. 그게 원인이었는지, 나는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숨이 찼고, 조금만 날이 추우면 쿨럭쿨럭 깊은 소리를 내며 기침을 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달린다. 하루의 끝에 옷을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고, 어두운 거리를, 트레드밀 위를 달리고 있다. 숨이 컥컥 막혀도, 다리가 비명을 질러도 꾹 참고 한참을 달리곤 한다. 지면을 차고 달리는 감각이,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방울이 피어나는 느낌이 좋다. 아마 어린 내가 폐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나는 달리는 것을 꽤 사랑하는 아이로 자랐을 것이다. 남들보다 긴 다리를 가졌음에도 항상 꼴찌를 벗어나지 못해 운동회가 싫지 않은 아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내가 달리고 있다.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지난겨울을 보내면서, 그리고 달리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

내가 가진 강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잘 참는 것일 뿐이라는 것.

체력이 없어도, 숨이 컥컥 막혀와도 참아내고 뛸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꽤 많이 지쳐있다는 것. 하지만 잘 참고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나는 늘 괜찮다고 이야기하지만, 외로움을 잘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 하지만 역시 잘 참아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내가 멈추고 싶어서 멈출 때까지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처음 달리기를 좋아하게 되었을 무렵, 호흡이 가파지는 것도, 다리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도 잊은 채 달릴 수 있는 러너스하이를 경험해보았다. 무아지경으로 달렸던 그때의 달리기를 기억한다. 겨울의 끝에 나는 달린다. 나는 꽤 잘 참는 사람이다. 숨이 막혀와도, 다리가 아파와도, 힘들어도, 외로워도, 잘 참고 달리다 보면 또다시 그 순간의 희열이 올 것임을 안다. 겨울의 끝에 나는 달린다. 내가 잘 견뎌낼 수 있음을 안다. 나는 달리기가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을 보내주는 속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